Page Nav

에디터정보

Haangle Latest

latest

우리 외할아버지, 서승효님

충남 청양 출생, 보성전문, 일본 와세다 대학, 상해 임시정부 활동,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 감옥에 투옥, 귀국 후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 여러 신문의 창간 및 기자생활, 그리고 독립 유공자.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


충남 청양 출생, 보성전문, 일본 와세다 대학, 상해 임시정부 활동,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 감옥에 투옥, 귀국 후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 여러 신문의 창간 및 기자생활, 그리고 독립 유공자.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참으로 근엄하시고 큰 산처럼 근접하기 어려운 분같이 느껴진다. 책에 실린 사진을 뵈면 잘생기신 외관에 꾹 다문 입술, 강한 눈빛이 더욱 더 그리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들의 할아버지는 너무나 자애로우시고 평생 큰 소리 한 번 치지 않으신 따스한 분이셨다.
젊은 시절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온몸을 바치셨다. 그리고 맞이한 감격의 8·15광복 그날, 할아버지께서는 정말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으셨다고 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셨다. 벅찬 해방의 기쁨과 감격도 잠시, 우리나라는 좌우로 갈라져 혼란스러웠고 동족상잔의 비극 6·25사변이 터졌다. 풍비박산이 난 나라와 각 가정들... 우리집이라고 피해갈 수 있었겠는가.
6·25사변이 터지기 전에 청양으로 내려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결과적으로 그곳이 우리 가족들의 긴 10년 간의 피난처가 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남북으로 이산가족이 되어 살아 돌아온 큰딸과 손자 세 명을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이해 주셨다고 한다.


죽은 줄만 알았던 딸과 손주들이 살아왔으니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새 생명을 얻은 듯 기쁨의 눈물을 한없이 흘리셨다고 한다. 그날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되었다. 할머니께서는 손발이 닳게 농사를 지어 식구들을 먹여 살리시고 닭, 오리까지 키워서 우리들을 살뜰히 해 먹이셨다. 덕분에 어린 우리들은 전쟁과는 머나먼 깊은 산골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젊어서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아이 셋 딸린 젊은 큰 딸을 보며 두 어른은 얼마나 깊은 시름에 밤마다 잠을 설치셨을까. 세월을 잘못 만난 부모의 숙명인가 한다.
그 후, 서울에 올라와서도 두 어른은 쭉 우리와 함께 사셨다. 서울로 오신 후 말년을 지내시는 동안 할아버지께서는 가끔 종로 단골 다방에 나가셨다. 그곳에서 옛날 동지분들을 만나 좋아하시는 담배와 커피를 드시면서 옛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셨다. 평생 청빈하셨던 옥골 선비 할아버지는 늘 가난하셨다. 엄마가 챙겨주신 커피값을 들고가면 담배연기 자욱한 컴컴한 다방에서 친구분들과 활짝 웃고 계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어제인듯 선하다.

나는 60년 전 잊을 수 없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하고 외치며 방으로 들어가니 할아버지께서 뇌출혈로 쓰러져 누워계셨다. 직장에서 헐레벌떡 뛰어오신 엄마와 할머니께서 걱정스런 얼굴로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말을 잃은 할아버지는 입술만 조금씩 움직일 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우리들은 한 사람씩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두 눈을 맞추고 무언의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그리고 며칠 후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영영 이별하였다. 지금도 우리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만 나와도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무한한 감사와 사랑과 그리움이 쌓여서일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기였던 제가 할머니가 된 지금도 많이 많이 보고싶습니다..
덧붙여 목숨바쳐 이렇게 아름다운 한글을 지켜주신 조선어학회 모든 우국지사분들께 엎드려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 서승효 선생이 제74주년 광복절(2019. 8. 15.)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대통령표창을 받은 날 외손들과 외손부들의 모습. 왼쪽부터 성죽순·최순옥(외손부), 이혜연·이혜경·박진영(외손녀), 박돈화(외손자).




이혜연

이혜연

서승효 선생 외손녀



댓글 없음

Latest Articles

LANGU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