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을까 1910년 조선은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 빼앗기면서 ‘국어’라는 명칭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조선 민족어를 없애려는 일제의 야욕은 일본어를 국어로 강제 채택했기 때문이다. 조선 역사 수업은 폐지되었...
한글이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을까
1910년 조선은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 빼앗기면서 ‘국어’라는 명칭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조선 민족어를 없애려는 일제의 야욕은 일본어를 국어로 강제 채택했기 때문이다. 조선 역사 수업은 폐지되었고 20만 권에 달하는 조선 역사서가 강탈되거나 소각되는 등 일제는 한민족의 혼을 없애려 했다.
조선의 말이 국어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자 국어를 지칭할 이름이 필요했다. ‘훈민정음’은 말하는 대로 쓰는 글이란 뜻의 ‘언문’이라고도 불렸지만,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사람들은 ‘훈민정음’을 얕잡아 칭하는 낮춤말로서의 ‘언문’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생겨난 이름이 ‘한글’이다. 한글은 ‘오직 하나의 큰 글’, ‘한나라 글’이라는 의미를 담고 1913년 이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그 시작의 처음에 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이 이 용어를 적극적으로 썼고 대중화 했다는 점에서 주시경설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길에서 만나는 한글』 42쪽, 김슬옹)
한글이라는 그 이름의 태동기에 활동하며 문법을 정리해 한글의 이론을 체계화 했고, 독립신문을 통해 국어로서의 한국어를 보급하고, 사라져 가는 한글의 뿌리를 지키고자 ‘말모이(사전 편찬)’작업을 시작하신 분. 국어연구학회(지금의 한글학회)를 조직하여 한글 발전과 계승에 초석이 되었던 분.
2024년 7월 27일은 한힌샘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신 지 110주년이었다. ‘한글학회’와 '세종국어문화원'에서는 선생의 서거 110주년을 기념하여 추모 답사를 기획했다. 주시경 마당을 기점으로 ➡️ 배재학당 ➡️ 상동교회 ➡️ 새절(봉원사) ➡️ 조선어학회터 ➡️ 한글학회를 다녀오는 여정이었다. 답사지에서의 설명은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한글학회 이사)이 맡았다.
주시경 마당(서울시 종로구 당주동 108)
주시경 마당은 2013년에 서울시와 종로구청이 주시경을 기념하기 위하여 내수동 공원을 주시경 마당으로 이름을 붙인 후 주시경과 헐버트의 상징 조형물을 설치한 자그마한 쉼터 같은 곳이다. 주시경은 ‘주보따리’란 그의 별명에 걸맞게 강의용 책 보따리를 들고 다니신 모습을, 헐버트는 그가 직접 펴낸 최초의 한글 전용 교과서 『사민필지』를 들고 있는 모습을 부조로 새겨 놓았다.
미국인 헐버트는 1886년에 신식 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와서 3년 뒤인 1889년에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미국 뉴욕트리뷴지(지금의 뉴욕타임즈)에 기고하여 세계에 알린 분이다. 1891년에는 최초의 한글로만 쓴 인문 지리 교과서 『사민필지』를 펴내는 등 당시 신학문을 배우던 주시경에게 한글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독립신문 발간에도 함께 했다. 한글의 역사에서는 주시경과 함께 중요한 분으로 두 분이 같은 공간에 서 계심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주시경 집터와 용비어천가
주시경마당 근처에는 ‘용비어천가(家)’라는 이름의 20층 건물이 있다. 이 자리는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살았던 선생의 집이 있던 자리다. 건물의 이름이 세종이 훈민정음을 짓고 가장 처음 사용한 작품인 ‘용비어천가’와 같다는 점에서 한글과 주시경을 기리고자 하는 마음이 배어난다.
배재학당(서울시 중구 서소문로11길 19, 정동)
배재학당은 아펜젤러가 세운 감리교 신학교로 학비가 없어서 학교를 다니기 어려운 학생들은 학비를 벌면서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주시경은 1896년 4월부터 배재학당에 있던 ‘삼문출판사’에서 임시직으로 일을 했다. 당시 독립협회를 운영하던 서재필은 헐버트, 윤치호 등과 주축이 되어 그해 4월에 독립신문을 창간하는데 주시경은 이 신문의 회계사무원 겸 교열 등 주요 역할을 맡았다. 독립신문이 한글 전용에 띄어쓰기까지 갖추어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주시경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또 구절을 떼여 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독립신문 창간사>, 주시경)
국어 강습소가 있던 상동교회(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30, 회현동)
상동교회는 1885년 스크랜턴이 정동감리교병원을 세우고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다가, 1900년 7월 병원이 세브란스병원과 통합되자 교회건물을 신축했다. 교회는 1902년부터 전덕기목사(당시 전도사)가 맡았으며 그는 상동청년학원을 세워 젊은이들에게 민족 교육을 했다. 이곳은 또한 김구· 이준 등의 독립투사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1907년 이 곳 지하실에서 헤이그특사 사건의 모의가 이루어졌으며, 같은 해 이 곳에서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어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이 전개된 곳이다.
주시경은 이곳에서 하기(여름) 국어 강습소를 세우고 한국어와 문법을 가르쳤으며 1907년 제1회 졸업생을 25명 배출하고, 제2회 수업까지 한 후 졸업식은 1908년 지금의 연세대 뒷산에 있는 안산 봉원사에서 했다. 1회와 2회 졸업생을 중심으로 국어연구학회(초대 회장 김정진)를 창립한 것이 조선어학회(지금의 한글학회)로 이어진 것이니 상동교회는 우리 말과 글을 통한 독립운동의 뿌리가 되는 곳이다.
한글모 죽보기
상동교회 7층에는 『한글모 죽보기』(한글 연구모임 연혁)가 전시되어 있다. 한글모임 죽 (훝어) 보기’ 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규영(1890-1920)이 1907년부터 1917년까지 10년 간에 걸친 조선언문회의 활동을 기록한 활동집이다. 총 108장의 필사본으로 되어 있다. 1907년 7월부터 상동교회에서 시작한 하기(夏期) 국어강습소를 시작으로 이후 학회와 강습소 명칭의 변경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한글모 죽보기』에 1908년 8월 31일에 봉원사에서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김정진을 뽑았다고 쓰여 있다. 이 학회가 오늘의 ‘한글학회’로 이어지는 것으로 한글학회는 봉원사에 학회 창립 회의를 기념하는 새김돌을 세워 놓았다.
조선어학회터(서울 종로구 화동 129-1번지)
1908년 8월 31일 주시경 선생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서울 봉원사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한 것을 시초로 1931년 1월 10일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치고 한글사전편찬을 시작했다. 이에 감명받은 당시 ‘건축왕’으로 불렸던 정세권(1888~1965) 선생은 1935년 2층 양옥을 지어 조선어학회에 기증했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일제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해체될 때까지 이곳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 마련(1933년), 표준어 사정(1936년), 외래어 표기법(1941년) 등 사전편찬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세권(1888~1965) 선생은 일본인들이 북촌으로 거주지역을 확장해오며 일본식 집이 지어지던 때, 오늘날 북촌과 익선동의 한옥마을을 만들며 조선인 거주공간을 지켜낸 분이다.
한글학회
조선어학회는 광복 후 1949년에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사전편찬의 뜻을 이어 1957년 『큰사전』(전6권, 1947-1957)을 발간 했다. 한글학회 벽면 서랍 속에는 사전을 집필할 때 썼을 46만 여장의 자료 카드가 빼곡히 들어있다. 카드 하나하나가 완성되기까지에는 온갖 사연이 담겨졌을 것이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했던 우리 말이었기에 우리 말을 모아 사전을 만든다는 설렘과 기쁨, 한편 두려움이 녹아 있을 것이고, 일상어를 활자로 남기려는 사람들의 땀이 배어 있을 것이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의 고통의 몸부림과 핏방울도 서려 있을 것이다.
해방 후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된 2천 600쪽의 종이 뭉치는 총 3804쪽 16만 4125개의 낱말을 품고 『큰사전』으로 태어났다. 지구상 현존하는 3천여 개 언어 중 고유 사전을 가지고 있는 언어는 20여 개 정도이다.
서울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에서 우리말을 모으며 하나가 되었던 시간의 역사, 말과 글을 잃으면 민족도 멸망한다 했기에 민족성을 유지하고자 목숨을 다해 지켜내려 했던 우리의 말과 글.
그러나 이제는 우리 말을 사용한다고 잡아가는 일본 경찰도 없는데,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시간에 머물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은,
자랑처럼 무성하게 외국어를 쏟아내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 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 중에서, 주시경
차민아 / Cha Mina
한글닷컴(Haangle.com) 대표,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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