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시간, 1학년 아이 셋이 운동장 끄트머리에 쪼그려 앉아 흙장난을 하고 논다. 나무 꼬챙이 하나씩 들고 땅을 푹푹 판다. 땅이라고 가만 있을까, 더 딴딴해져 버틴다. 그 옆에 나도 쪼그려 앉았다. 손을 쫙 펴서 땅바닥을 싹싹 쓸어 고르자 눈...
점심 시간, 1학년 아이 셋이 운동장 끄트머리에 쪼그려 앉아 흙장난을 하고 논다. 나무 꼬챙이 하나씩 들고 땅을 푹푹 판다. 땅이라고 가만 있을까, 더 딴딴해져 버틴다. 그 옆에 나도 쪼그려 앉았다. 손을 쫙 펴서 땅바닥을 싹싹 쓸어 고르자 눈이 큰 유정이가 거기다 동그라미를 싹 그린다.
“우와, 동그라미 잘 그렸다!”
“아니에요, 이건요, ‘이응’이에요. 히히.”
“히야, 대단한데?, ‘이응’도 다 알고. 그치만 요건 모르지?”
거기다 ㄴ을 쓰고 ㄹ을 쓰고 ㅁ, ㅂ도 썼다.
“니은, 리을, 미음, 비읍!”
새끼 제비들처럼 한목소리로 말한다. 짝짝짝 손뼉을 쳐주었다. 문득 골려줄 마음으로 이번엔 ‘ㄱ’을 쓰고는 “요건 모르지?” 했다.
“기역!”
“헉, 이게 무슨 ‘기역’이냐? ‘기윽’이지, ‘기윽’.”
내가 고개를 삐끗 꼬면서 말했다.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면서 숨을 푸욱 내쉰다.
“어후, 이건 ‘기역’이에요.”
“아니지. 봐 봐, 얘는 니은, 얘는 리을, 얘는 미음, 얘는 비읍, 그리고 요건 이응이지? 그러니까 얘는 ‘기윽’, 얘는 ‘디읃’, 얘는 ‘시읏’이라고 해야지, 안 그래?”
어이가 없는지 입을 쩍 벌린다. 그리곤 다시 지지 않고 또박또박 말한다.
“아, 아니예요. 이건 ‘기역’, 이건 ‘시옷’, 이건 ‘디귿’이라고 해야지요.”
“에헤, 봐 봐. 니은, 리을, 미음, 비읍, 이응 할 때 모두 [이으] 앞뒤로 ㄴ, ㄹ, ㅁ, ㅂ, ㅇ을 넣어서 딱딱 소리내지? 그래서 ‘ㄱ’도 기윽, ‘ㄷ’도 디읃, ‘ㅅ’은 ‘시읏’ 해야지, 안 그래?”
“하아, 답답해. 이건 기역, 니은, 디귿이에요, 뭐.”
아까보다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다. 저희끼리 귀엣말로 뭐라뭐라 속닥속닥한다.
“그러면 왜 그런지 말해 봐.”
“어후, 그냥 기역, 니은, 디귿이지 왜가 어디 있어요?”
여간 야물딱진 녀석들이 아니다. 하지만 뭐라 되받아치긴 해야 하는데 답답해하다가는 “아, 몰라요. 몰라!” 하고 손을 탈탈 털면서 교실 쪽으로 뛰어간다.
두 시쯤 집에 갈 땐데 유정이가 국어책을 들고 왔다. 내 책상에 척 들이밀며 식식댔다. 기역이라고 글자 이름이 나온 쪽이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폭 가리곤 안 보겠다고 버티니까 눈 크게 뜨고 보라고 한다.
“봐요, 내 말이 맞지요? ‘기역’ 맞지요?” 교감씩이나 되어서 이렇게 엉터리로 말해 줘서야 되겠냐고 따진다. 아이고, 민망해라. 그나저나 입술에 손을 대고 쉿! 쉿! 해도 봐 주는 게 없다. 얼른 사탕 한 알 꺼내주면서 절대 비밀을 지켜달라고 했지만 그날부터 나는 ‘기역, 니은, 디귿도 모르는 교감’으로 소문이 쫙 나고 말았다.
구분 | ㄱ | ㄴ | ㄷ | ㄹ | ㅁ | ㅂ | ㅅ | ㅇ | ㅈ | ㅊ | ㅋ | ㅌ | ㅍ | 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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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몽자회 (최세진/1527) |
기역 | 니은 | 디귿 | 리을 | 미음 | 비읍 | 시옷 | 이응 | 지 | 치 | 키 | 티 | 피 | 히 |
언문철자법 (조선총독부/1930) |
기역 | 니은 | 디귿 | 리을 | 미음 | 비읍 | 시옷 | 이응 | 지읒 | 치읓 | 키윽 | 티읕 | 피읖 | 히읏 |
한글맞춤법통일안 (조선어학회/1933) |
기역 | 니은 | 디귿 | 리을 | 미음 | 비읍 | 시옷 | 이응 | 지읒 | 치읓 | 키읔 | 티읕 | 피읖 | 히읗 |
초등학교 교과서 (교육부/2024) |
기역 | 니은 | 디귿 | 리을 | 미음 | 비읍 | 시옷 | 이응 | 지읒 | 치읓 | 키읔 | 티읕 | 피읖 | 히읗 |
모두 알다시피 1학년 국어 시간에 기역, 디귿, 시옷으로 가르치고 배운다. 국어책에 그렇게 나왔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글자 모양을 구분하고 소리 다름을 안다는 말. 지금이야 당연한 듯 쓰지만 애초 『훈민정음』에 닿소리든 홀소리든 이름이 없다. 지금 닿소리 이름은 세종이 ‘훈민정음’이란 글자를 짓고 백년쯤 지나 최세진이 쓴 한자 공부책인 『훈몽자회』(1527)에 처음 나온다. 최세진은 글자 이름만 알아도 첫소리와 끝소리에서 어떻게 소리나는지 알 수 있게 [이으] 앞뒤로 닿소리를 붙여 글자 이름으로 삼았다. 그런데 ‘ㄱ’은 ‘기윽’으로 해야 하는데, ‘윽’으로 소리나는 한자가 없어서 ‘役’(역)으로 쓴다. ‘읃’도 마땅한 한자가 없어서 末(말) 자에 동그라미치고 뜻으로 읽어 ‘귿 말’이니 ‘디귿’, ‘읏’ 도 衣(의) 자에 동그라미 쳐서 ‘옷 의’이니 ‘시옷’이 되었다는 식으로 이름을 붙였다. 궁리하다 억지로 짜낸 방법이다. 첫소리로만 쓰는 ‘ㅋ, ㅌ, ㅍ, ㅈ, ㅊ, ㅿ, ㅇ, ㅎ’ 은 ‘키( ), 티, 피, 지, 치, ᅀᅵ(而), 이(伊), 히(屎)’처럼 써서 첫소리가 어떻게 나는지만 보였다. 그러니 이들 글자는 이때도 이름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일제강점기인 1930년, 조선총독부는 「언문철자법」을 낸다. 이때 닿소리 이름을 정할 때 『훈몽자회』 범례를 그대로 따르되 ‘지읒, 치읓, 키윽, 티읕, 피읖, 히읏’으로 한다. 그리고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에 가서 ‘키윽, 히옷’은 ‘키읔, 히읗’으로 바꾸어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써온 셈이다.
그래서 말인데, 여러분 생각은 어떤가 ‘기역, 디귿, 시옷’을 버리고 ‘기윽, 디윽, 시읏’으로 고쳐서 안 될 까닭이 있을까. 마땅한 한자가 없어 궁여지책으로 소리가 비슷한 글자를 끌어들여 쓴 이름 아닌가. 그러나 최세진이 이름을 지을 때와 다르게 지금은 얼마든지 한글로 적을 수 있다. 애초 최세진의 생각을 존중한다면기윽, 디읃, 시읏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에게첫소리와 끝소리가 어떻게 나는지 가르치기도 편하고닿소리 이름도 배우기도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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