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 수업 중에 한 외국인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했다. 말은 떠듬떠듬했지만 그의 질문의 요지는 이랬다. 한국인은 빈말을 잘하는데 어떻게 하면 한국인들이 하는 말이 빈말인지 참말인지를 가려들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이 의례적...
한국 문화 수업 중에 한 외국인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했다. 말은 떠듬떠듬했지만 그의 질문의 요지는 이랬다. 한국인은 빈말을 잘하는데 어떻게 하면 한국인들이 하는 말이 빈말인지 참말인지를 가려들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이 의례적으로 “밥 한번 먹자.”, “다음에는 같이 가자.”는 말에 그 자리에서 약속 시간을 물었다거나 여전히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외국인들의 이야기들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빈말 인사성 표현’에 대한 설명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어떤 일을 겪었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어느 수업에서 교수님이 내 주신 주제에 대해 나름대로 열심히 조사한 후에 같은 조의 한국인 친구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친구가 웃으면서 “괜찮네.”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최종 보고서에는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하나도 담지 않았고, 심지어 다른 친구에게 외국인과 조 활동을 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그 친구가 조사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고 솔직히 말했더라면 좀 더 조사했을 텐데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자신이 찾은 자료를 버려버린 것이 매우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이 학생이 한국인들은 빈말을 잘한다고 지적한 부분은 속으로는 괜찮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괜찮다고 말한 것에 있다. 과연 괜찮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괜찮지 않은 것을 괜찮다고 하면 그것은 정말 빈말일까? 사전에 ‘괜찮다’를 검색해 보면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다.
1. 별로 나쁘지 않고 보통 이상이다.
2. 탈이나 문제, 걱정이 되거나 꺼릴 것이 없다.
이 정의에 따르면 ‘괜찮다’는 것은 아주 좋은 것은 아니지만 꽤 긍정적인 의미를 뜻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사전적인 의미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경우도 쉽게 접할 수 있다.
(1) 주연: 제가 도와줄게요. | 아영: 괜찮아요. 혼자 해 볼게요.
(2) 수빈: 추워? 냉방기를 끌까? | 미선: 괜찮아. 겉옷을 걸칠게.
아영이는 주연이가 도와주지 않아도 됨을, 미선이는 수빈이가 냉방기를 꺼 주지 않아도 됨을 강하게 표현하지 않고 부드럽게 거절하고 있다. 상대방의 제안에 강한 부정을 하는 것이 상대방의 체면에 손상을 줄 수 있으므로 ‘괜찮다’를 사용하여 필요하지 않다는 부정의 의미를 내비치는 것이다. 즉, 완곡어법 (euphemism)을 사용하여 제안에 대한 거절의 의미로 ‘괜찮다’를 사용하고 있다. 또 다른 예시를 보자.
(3) 민호: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좋은 사람이 있는데 소개 받는 것 어때요? | 유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괜찮네요. 바쁜 일 끝나면 말씀드릴게요.
(4) 태은: 어때? 내가 만든 된장찌개야. | 지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괜찮네. 다음에 또 만들어 줘.
이 경우는 앞선 상황과는 다소의 차이가 있다. 앞에서는 ‘괜찮다’를 완곡하게 거절하기 위하여 사용했다면 여기에서는 표면적으로 거절의 의미조차 잘 드러나지 않는다. 유진이는 소개 받는 대상이, 지영이는 태은이가 만든 된장찌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방의 호의를 강하게 부정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으므로 ‘괜찮다’는 말로 긍정적인 모양을 취했다. 민호는 소개를 받고 싶다는 유진이의 연락을 기다리고, 태은이는 지영이가 된장찌개를 만들어 달라는 말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진이와 태은이는 아마도 그들의 연락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진이와 태은이는 자신의 마음과는 다른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진이와 지영이는 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직설적으로 하지 않았을까? 말을 한 대상이 직장의 상사나 선배이기 때문에 거절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고, 상대방의 호의에 전면적으로 충돌하는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혹은 더나아가 직접 거절하기 어려운 것을 돌려 표현해도 상대방이 알아줄 것이라는 기대를 했을 수도 있다. 어떤마음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화자의 내면에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고민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괜찮다’를 사전적인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성공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다시 외국인 학생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발표 자료를 열심히 준비한 외국인 학생은 분명 한국인 친구에게 괜찮다는 말은 들었으나 그 결과는 괜찮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괜찮다는 말이 ‘인사성의 빈말’이었던 것이다. 한국인 학생은 왜 외국인 친구에게 괜찮다고 했을까? 혹시나 부족해 보인다고 말하면 상대방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아니었을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빈말은 “실속 없이 헛된 말” 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한 말이 과연 실속 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는 것은 헛된 말이 아니라 배려가 가득한 말이 아닐까? 나는 배려가 가득한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배려가 가득한 말을 듣고 싶다. “이 글 참 괜찮다.”, “이 생각 참 괜찮네.”, “너는 괜찮은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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