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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학회의 여러 이름, 그 사실과 오해들

1. 대한제국(한국) 시기― ‘국어연구학회’ 국어의 연구와 교육에 골몰하던 한힌샘 주시경은 1907년 여름방학에 ‘하기(여름) 국어강습소’를 개설하였다. 국어학을 교육하는 ‘단기 대학’이었으니, 2달 동안 국어의 음운론, 품사론, 통사론 등을 ...

1. 대한제국(한국) 시기― ‘국어연구학회’

국어의 연구와 교육에 골몰하던 한힌샘 주시경은 1907년 여름방학에 ‘하기(여름) 국어강습소’를 개설하였다. 국어학을 교육하는 ‘단기 대학’이었으니, 2달 동안 국어의 음운론, 품사론, 통사론 등을 강의하였다. 수강생은 대부분 한국인 학생이었고, 20명이 졸업하였다. 그 강습소는 제7회까지 이어졌으며, 제3회까지는 한힌샘이 직접 강의하였다.

1908년 8월 31일은 제2회 강습소의 증서수여식(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한힌샘 스승으로부터 증서를 받은 졸업생들은 스승과 그의 동지인 남형우 선생을 모시고, 돈의문(서대문) 밖의 불교사찰 봉원사에 모여 학회를 창립하였다.
‘국어연구학회’, ‘국어 연구’를 목적으로, 국민 스스로 발의하고, 국민이 회원인 학회였다.

㈀ 인터넷에서 ‘한글학회’를 검색해 보면 “1907년에 설치되었던 국문연구소를 계승”했다는 글이 뜨는데 사실 이 아니다. 국문연구소는 1907년 7월부터 1909년 12월까지 국문(한글)과 국문 철자법에 관한 연구과제를 수행한, 대한제국 국립 연구기관이었으며, 그 위원의 한사람으로 한힌샘이 참여했을 뿐이다.

㈁ 학회 창립 때에 목적한 ‘국어 연구’는 오늘날까지 한결같다. ‘국어’를 시대 상황에 따라 ‘조선의 언문言文→ 조선어→ 국어 국문→ 우리 말과 글’로 고치고, ‘연구’를 ‘실행, 통일, 발전, 보급’으로 확대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인터넷에는 “조선어학회=일제강점기 전에 창립되어 식민지 기간을 거쳐 오면서 한글연구와 보급을 위해 앞장섰던~”, “한글학회=한글연구, 통일, 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등과 같은 글이 적지 않다. 국어, 한국어, 우리말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한글’이 그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다. ‘한글’이 한국어를 대신하거나 포괄할 수 없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2. 나라 잃은 시기의 이름들

조선언문회: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었다. 분하고 원통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고, ‘국어’는 일본어를 가리키게 되었으니 ‘국어연구학회’라는 이름을 유지하기 곤란하였다. 결국 1911년 9월 ‘조선언문회朝鮮言文會’로 고쳤으며, 토박이말로 ‘배달말글몯음’이라고도 하였다.

한글모: 1913년 3월 23일 다시 ‘한글모’로 바꾸었다. ‘조선/배달→한韓’, ‘말글→글’, ‘몯음→모’로 축약한 것인데, 한힌샘이 세상을 떠나신 후로 회의 활동이 점점 위축되었으니, 1917년 초엽 이후로는 사용한 일이 거의 없었다.

조선어연구회: 1919년 3·1항쟁 이후에는 보통 ‘조선어연구회’라고 했으며, 1921년 12월 3일에는 임원을 새로 뽑고 조직을 정비했으며, 1930년까지 그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 우리의 조선어연구회 외에도 같은 시기에 조선인끼리 조직한 갖가지 조선어연구회가 곳곳에 있었다. 예컨대, 전라북도 전주에는 그 지방 사람들이 조직한 조선어연구회가 있었고, 경성(서울) 수송보통학교 교사들은 조선어 교과 교육에 필요한 정보를 공유할 목적으로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였다. 학생들의 비밀 조직 조선어연구회들도 있었다.

㈁ 일본인 중심의 조선어연구회들이 있었다. 일본어로 각종 조선어 학습서와 잡지 『조선어』를 발행·판매한 조선어연구회가 대표적인데, 경성에 주소를 두고 일본인이 경영하였다. 또, 관공서에 근무하는 일본인으로 조직된 조선어연구회가 곳곳에 있었다. 일본인이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한 것은 우리의 조선어연구회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는 글이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

조선어학회: 1931년 1월 10일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꿨다. 일본인 중심의 조선어연구회와 차별화하며, 힘차고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기 위하여 ‘연구회’ 를 ‘학회’로 바꾼 것이었다. 그 이름은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재출발한 1949년 9월까지 유지하였다. 그동안 영어 이름은 일정한 것이 없었고 쓰는 사람이 알아서 적었다. 예컨대, 1948년 정태진은 「Korean Alph abet」(영어글)이란 글에서 ‘the Korean Language Soci ety’ 라고 했으며, 1949년 8월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유엔 한국위원회 회의록(영어글)에서는 ‘the Kore an Language Institute’라고 기록하였다.

㈀ 조선어학회를 조선어학연구회와 혼동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조선어학연구회는 1931년 12월부터 1941년 4월까지 존속했는데, 박승빈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극렬히 반대한 단체이다. 그런데, 그 회를 ‘조선어연구회’나 ‘조선어학회’라고 하는 사례가 있으며, 조선어학회의 중요 공적과 발자취를, 그 회의 소개글과 나란히 배치한 영상물이 최근 인터넷과 유튜브에 떠돌고 있다.

㈁ 『말모이』는 한힌샘이 문하생 김두봉·권덕규· 이규영과 함께 작성한 우리말 사전 원고이다. 그 원고를 조선어학회에서 넘겨받아 『큰사전』으로 완성했다는 담화나 글이 있는데, 조선어학연구회로 넘어간 것을 잘못 표현한 것이다. 애초부터 그 사전의 편찬 사업에 자금을 대고 작업 공간을 내어준 단체는 조선광문회였으니, 한힌샘의 별세와 김두봉의 망명 후에 『말모이』 원고는 광문회에 그대로 남았다. 이후 계명구락부로 넘어갔으며, 1937년에는 다시 조선어학연구회로 넘어갔는데 결실은 없었고 원고는 흩어져 버렸다. (지금은 그 일부가 국립 한글박물관에 있으며, 2020년 12월 22일 국가기록유산(보물) 제2085호로 지정되었다.)

3. 남북 분단 이후― ‘한글학회’

8·15 이후, 남북의 체제 경쟁이 격화하면서 1949년 ‘조선어학회’를 버리고 ‘한글학회’라는 새 이름을 선택하였다. 평양의 ‘조선공화국’에 들어간 ‘조선’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몰린 때문이지, 목적의 중심을 조선어(한국어)에서 한글(문자) 쪽으로 옮긴 것이 아니었다.
1966년 7월 발행한 『한글』 제137호에서 학회의 영어 이름으로 ‘the Korean Language Research Society’가 활자화하였다. 「한글학회 소개」의 첫머리였으며,제142호(1968.10)부터는 『한글』 뒤표지에 빠짐없이 표기하였다. 그런데 1981년 3월 발행한 『한글』 제171호에서 ‘the Korean Language Society’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니 지금은 ‘한글학회’와 ‘the Korean Language Society’(한국어학회), 학회의 이름이 둘인 셈이다.




리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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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대 명예교수

daegok@cnu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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