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 동생은 고등학교를 배정받고 펑펑 울었다. 시내 중심에 있는 학교에 배정 받기를 바랐는데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산 좋고 공기 좋은 깊은 산 속(?) 여고에 배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린 곧잘 동생을 놀리는 노래를 부르곤 했는...
30여 년 전 동생은 고등학교를 배정받고 펑펑 울었다. 시내 중심에 있는 학교에 배정 받기를 바랐는데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산 좋고 공기 좋은 깊은 산 속(?) 여고에 배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린 곧잘 동생을 놀리는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때 부른 노래가 ‘깊은 산 속 옹달샘’을 패러디한 노래였다.
(원 가사)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깊은 산 속 **여고 누가 왔다 가나요?)
(원 가사)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새벽에 **이가 눈 비비고 일어나)
(원 가사)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공부하러 왔다가 밥만 먹고 가지요.)
새벽 일찍 학교에 가고 학교에 가서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먹던 당시의 학창 시절 풍경이기도 하다. 이제는 불러본 기억조차 희미해진 ‘깊은 산 속 옹달샘’ 노래를 30년도 훌쩍 지난 지금에 와서 뜬금없이 불러내다니. 다들 눈치를 채셨으리라.
충주시 노은면 깊은 산 속에 들어서면 나무들 사이로 파스텔 톤의 소박한 건축물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누군가 자연과 조화로운 그림을 그리려 한 듯 멀리서 보면 흡사 나무 사이 평면적인 그림 같지만 가까이 가면 자연과 건축물이 어우러진 공간에 들어와 있는 나와 마주한다. 동요적 상상을 곁들여 보자면 카드를 열자마자 입체적 조형물이 튀어나오는 입체카드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곳을 방문한 ‘그대 그리고 나’가 풍경이 되는 공간. 이내 공간은 이야기를 담은 채 말을 걸어온다. 하얀 하늘 집, 비채방, 숯채방, 숲속에 그린 하우스, 동그라미집 등은 공간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2001년부터 이메일로 좋은 글귀를 담아 아침편지를 배달해 온 아침편지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명상센터 ‘깊은산속 옹달샘’의 풍경이다.
아침지기 고도원 이사장에 의해 20년 넘게 배달된 아침편지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용기를 주었고 꿈을 꾸게 만들었다. 이제 ‘깊은산속 옹달샘’은 치유의 공간이자 꿈 너머의 꿈을 담은 정신적 가치와 함께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고도원 이사장은 역경과 고난과 좌절의 절벽을 넘어온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는 멈추지 않고 달리다 그 스스로 육체적 강제 멈춤을 당했다. 때문에 멀리 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잠깐 멈춤’을 통해 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깊은산속 옹달샘’에서 식사를 하다 보면 야트막한 종소리가 들려오고 종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잠시 하던 식사를 멈춘다. 그리고 몇 초 후 다시 종이 울리면 식사를 이어가는 풍경, ‘잠깐 멈춤’을 실천하는 한 예이다.
‘링컨학교’와 ‘꿈 너머 꿈 국제대안학교’로 청소년 교육을 시작한 그는 이제 해외로 시야를 넓혀 재외동포 청소년을 품기 위한 ‘K-디아스포라 세계연대’를 꾸렸다. 그는 이제 사회적 할아버지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한다. 누군가는 가정을 넘어서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 정신을 품게 한 것 또한 ‘꿈’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역할과 사회적 영향력을 고민하며 여전히 나아가고 있는 그를 보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일까’를 생각한다. 그가 좌절의 절벽을 지나면서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면서 꾸었던 도전과 꿈, 그것은 정신적 자산으로 일궈져 비록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을 지라도 다시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이 되었고, 새 길을 써 나가게 하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책이 곧 권력이던 시대가 있었다. 사실은 문자가 권력이었다. 문자를 알아야 책을 읽을 수 있었기에 문자로 표기된 책을 만들어내던 지배층은 그들이 지닌 걸 나누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급 사회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소중하지만 우리 주위에 늘 머물러 있어 일상이 된 공기처럼, 소중함을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이 있다. 수천 년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 온 한국의 역사 속에서 민중들이 책을 읽고 지식을 얻은 역사는 불과 600년이 되지 않는다. 한글에 대한 이야기이다.
‘깊은산속 옹달샘’에서 18km 정도 떨어진 충주의 고미술 거리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박물관이 있다. 김상석 관장이 2009년도에 개관한 ‘우리한글박물관’이다. 현재 서울에 있는 ‘국립 한글박물관’보다 5년 일찍 만들어진 셈이다.
▲ 〈세종국어문화원〉김슬옹 원장, 〈우리한글박물관〉김상석 관장, 〈깊은산속 옹달샘〉고도원 이사장
박물관에는 김상석 관장이 40여 년 전부터 모으기 시작한 한글과 관련한 문화·생활사 자료 약 500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시대를 거치며 쓰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온 한글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 개인 박물관이다 보니 자료에 비해 전시 공간이 부족하여 많은 자료들이 수장고에 있어 상설 전시로 만나 볼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김상석 관장은 변변한 한글박물관 하나 없는 현실에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나섰다고 한다. 학창 시절부터 우표와 화폐를 취미로 수집하다가 자연스럽게 고서적으로 연결됐다는 그는 한글 고서적들을 취급하다가 “우리는 왜 한글을 전문으로 하는 박물관이 없을까”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결국 박물관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한글은 양반의 글이라기보다는 민초들의 글씨였기에 더욱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비록 학자는 아니지만 한글 생활사에 대한 끓어오르는 마음은 전국을 돌며 자료를 수집하게 하였고 그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 해외에서도 연락이 온다고 한다. 그는 자료를 살 때에는 제 값을 주고 비싸게 사야 좋은 게 손 안에 들어 온다며, 싸게 사려면 절대 나에게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학술회 등의 행사 때 무상으로 자료를 빌려주기도 했으나 박물관 운영을 위해 지금은 유료화 했으며, 한글문패 체험, 궁중 윷놀이 채색 체험 등 가족단위, 연인 단위의 각종 체험활동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상상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누군가는 계획을 세우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린다. 다양한 사람들이 가진 재능은 또 다른 누군가의 재능과 만나 의미 있는 일을 만들어 낸다. 시대를 넘어서는 가치 있는 일은 누군가가 가진 생각과 열정이 만나 함께 어우러지는 일이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일, 오늘도 그들의 열정은 깊고도 가득한 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차민아 / Cha Mina
한글닷컴(Haangle.com) 대표,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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