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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소헌왕후 그리고 『월인천강지곡』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은 『용비어천가』와 함께 훈민정음 창제 즈음에 최초의 시가 문학 작품들이다. 특히 『월인천강지곡』은 우리말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점이나 어휘 활용면에서도 높은 문학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집이다. 1459년(세조 4년)...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은 『용비어천가』와 함께 훈민정음 창제 즈음에 최초의 시가 문학 작품들이다. 특히 『월인천강지곡』은 우리말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점이나 어휘 활용면에서도 높은 문학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집이다. 1459년(세조 4년) 간행된 『월인석보』 권1에 소개된 『월인천강지곡』의 간행 경위를 요약해 본다.

“소헌왕후 심씨(세종의 비)가 세상을 떠나자,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이 산문 형태로 『석보상절』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을 보고 감동된 세종이 직접 시가 형식으로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은 “달이 무수히 많은 강에 그림자를 드리운다”라는 말로, 월인천강지곡은 “부처님의 본체는 하나지만 오랜 세월 동안 화신하여 교화하심이 마치 달이 천강을 비침과 같음을 노래함.”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절대성, 신성성을 찬양하는 찬불가라고 볼 수 있다. 의미를 알고 나면, ‘월인천/강지곡’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월인/천강지/곡’이 바르게 읽는 것임을알게 된다. 원래는 상, 중, 하 3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상권 1책과 중권의 낙장이 전할 뿐이다.

『월인천강지곡』을 지을 즈음의 시대적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되면, 세종이 비운의 삶을 살았던 아내(소헌왕후)를 그리워하는 정이 잘 나타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헌왕후 심씨는 누구인가? 심온(훗날 영의정에 오름)의 따님으로, 14세가 되던 해(1408년)의 2월에 2살 아래 12세인 충녕대군(훗날 세종)과 결혼해서 38년을 세종과 함께 살면서 8남 2녀를 낳았다. 소헌왕후는 세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왕비로 전해지며, 남편이 많은 공적을 세울 수 있도록 훌륭히 내조하였으며, 자애로우면서도 왕실의 엄격한 기강을 잡은 중전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왕후는 1446년(세종 28년) 봄에 이질로 세상을 떠난다. 바로 그해 음력 9월 상한에 훈민정음이 반포되던 해였다.

여기까지로 보면, 소헌왕후는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의 왕비로 행복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를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소헌왕후는 참으로 불우한 분이셨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결혼 당시 남편은 세자 자리와는 상관없는 셋째 아들이었는데, 큰 형인 양녕대군이 계속되는 비행으로 인해서 세자 자리에서 쫓겨난 뒤, 1418년 6월 남편이 세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은 영의정에 오르는 가문의 영광도 있었지만, 오히려 이 일은 가정의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아버지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도 승하하기까지 4년 간 상왕의 자리에서 정치에 개입했는데, 한번은 어느 신하의 실수로 군사에 관한 일을 상왕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을 받게 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벌을 받게 되는 중에 심온도 연루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중에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족들은 귀양을 가거나 노비가 되고 만다. 왕비의 가족이 이토록 석연찮은 이유로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이때 소헌왕후도 ‘역적의 딸’로 몰려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위기에 있었으나 세종의 간곡한 청으로 겨우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왕비의 아버지는 역적으로 죽고 어머니는 노비로 살아가는 기막힌 상황이 상왕이 죽기까지 계속되다가 겨우 사면을 받게 된다. 이 참담한 사건의 배후에는 태종의 그릇된 정치의식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세종이 처가 세력의 힘에 휘둘리지 않을까 염려되어 태종이 의도적으로 죄를 씌워서 왕비 심 씨 가문을 몰락시켰다고 보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라고 하니, 너무도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헌왕후는 며느리의 복도 참으로 없었다. 첫 번째 세자빈은 미신을 심하게 믿는다는 이유로 폐위되고, 두 번째 세자빈은 궁궐 안에서 다른 남자와 연애를 했다는 이유로 폐위된다. 세 번째 세자빈 현덕왕후 권 씨는 원손(훗날 단종)을 낳은 다음 날 병으로 죽게 된다. 더구나 8남 2녀 중에 큰딸 정소공주, 5남 광평대군, 7남 평원대군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도 있었다. 자신이 죽은 뒤에도 차남 수양대군이 3남 안평대군과 6남 금성대군 그리고 손자 단종을 죽이는 비극이 있었으니, 너무도 안타까운 가족사가 아닐 수 없다.

세종이 그렇게 사랑했던 왕비 소헌왕후를 기리며 시로 지어 부른 『월인천강지곡』에는 부처님의 일대기이지만, 아내 사랑의 지극한 정이 표현되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만 리 밖의 일이시나 눈에 보는가 여기소서”

      - (제2장)

     “목련이 오거늘 아들 라운이를 깊이 감추시니”

      - (제138장)

제2장의 내용은 부처의 행적이지만, 세종은 만 리 밖의 천국(저승)에 있을 왕비를 그리워하는 정이 녹아내리고, 제138장도 실달태자의 아내 야수타라의 아들 사랑의 정이지만, 소헌왕후의 자녀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이 감정이입되어 표현되었다고 느껴진다.

조선 역사상 최고의 성군인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 훨씬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다. 그 수많은 업적들 하나하나마다 세종의 고뇌와 고통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누구도 찬성하지 않았던 한글 창제와 반포가 그 대표적일 것이다. 그래서 1446년 봄에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하지만, 훈민정음을 완성해서 그해 가을에 반포하고, 다시 이듬해 『월인천강지곡』을 지어 아내를 기리는 세종의 모습과 한글 사랑의 고귀한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된다.

세종은 『월인천강지곡』을 짓고 3년 후인 1450년 54세에 승하하게 된다. 경기도 여주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무덤인 영릉이 있다.



김진규

김진규

공주대 명예교수

jkkim33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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