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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 표기와 외국어 표기 ─없어진 글자 ㅸ, ㅿ, ㆍ 등의 쓸모에 대하여─

세종 임금은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하셨고, 현재 우리의 맞춤법에서는 ㆁ, ㆆ, ㅿ, ㆍ 네 글자가 없는 24개의 낱자를 쓰고 있다. “ㆁ, ㆆ, ㅿ, ㆍ” 네 낱자를 ‘없어진 글자, 소실문자, 안 쓰이는 글자’ 등으로 칭하고 있다. 그런데 합...


세종 임금은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하셨고, 현재 우리의 맞춤법에서는 ㆁ, ㆆ, ㅿ, ㆍ 네 글자가 없는 24개의 낱자를 쓰고 있다. “ㆁ, ㆆ, ㅿ, ㆍ” 네 낱자를 ‘없어진 글자, 소실문자, 안 쓰이는 글자’ 등으로 칭하고 있다. 그런데 합자까지 범위를 넓히면 홀소리 글자는 ㆇ ㆊ ㆉ ㆌ ㆈ ㆋ ᆝ ᆜ 등이, 닿소리 글자는 ㅸ ㅹ ㆄ ㅱ ᄛ 등과 ㅳ ㅶ ㅻ ㅼ ㅽ ㅴ ㅵ 등이 쓰이지 않고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15세기의 훈민정음 표기 체계가 현행 맞춤법에서 쓰는 한글 낱자보다 개수도 많았지만 낱자의 결합 방법도 훨씬 다양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이 글자들을 살려서 쓰면 한글(또는 훈민정음)로 훨씬 정확하게 적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이 글자들을 되살려서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글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잘못된 생각들이 널리 퍼져 있다.

  1. 이 글자들이 있으면 세상의 모든 언어를 적을 수 있다.(훈민정음 정인지 서문 참조)
  2. 이 글자들을 일제강점기에 없애버렸고 그 결과 한글의 표음력이 저하되었다.
  3. 이 글자들이 있으면 외래어를 더 정확하게 적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언어를 적는 글자는 아직 인간이 개발해내지 못하였다. 따라서 1번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2번 주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1912년에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에서 ‘아래 아’를 쓰지 않도록 정했지만 이 글자는 이미 18세기 이후부터 음소의 지위를 잃어버려 글자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으므로 쓰지 않는 것은 타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33년에 조선어학회에서 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도 ‘아래 아’를 쓰지 않기로 한 것을 보면 이러한 사정을 이해할 수가 있다. 나머지 글자들도 해당 소리(음소)가 없어짐으로써 자연스럽게 사라졌으므로 이 글자들이 없어서 표음력이 저하된 것이 아니다. 이처럼 1번과 2번의 주장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아래에서는 외래어 표기와 관련한 3번 주장에 한정하여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지금의 외래어 표기법은 외래어를 현행 한글 낱자인 24자 만을 써서 표음 위주로 적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1941년에 조선어학회에서 제정 공표한 이래에 1986년에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외래어란 ‘들어온 말’이라고도 하는데 간략히 말하자면 외국어에서 들어온 낱말 중에서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익숙하게 사용되어 마치 우리말인 것처럼 인식되는 말이다. 예를 들자면 ‘커피’라는 말은 영어 등의 ‘coffee’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 단어가 우리말에서 사용되면 [f]음이 [ph]로 바뀌므로 ‘커피’로 적는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우리 한국인들이 [ph]와 [f]를 구별하여 발음할 수도 있으며, [f]를 표기하는 글자도 15세기에 있었으므로 그것을 되살려 쓰면 되는데 왜 이렇게 틀리게 표기를 하느냐’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현행 외래어 표기법은 한글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잘못된 규정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행 외래어 표기법이 전적으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24자 만을 써서 표기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을 정확하게 적기 위하여 애써 ‘ㆄ(또는 ᅋ)’과 같은 글자를 도입하여 ‘커ᅗᅵ’로 적는다고 하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더 정확한 표기라고 하더라도 ㅍ과 ㆄ을 구별하여 표기함으로써 우리의 글자 생활은 매우 불편하게 된다. 한국인 중에서 영어의 [f]를 제대로 인식하고 발음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맞춤법은 한국인이면 다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지금까지는 우리가 발음하는 대로 적으면 되었는데 이제 ‘ㅍ’을 가진 외래어에 대해서는 그것을 적기 전에 그것이 [ph]에 해당하는지 [f]에 해당하는지를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여간 불편하지 않다. 일반인이 ‘인플레, 파인애플, 프라이팬’ 등을 적으려면 이들 ㅍ 중에서 원래말에서 [f]인 것들을 알아야 하는데 이를 알아내기 위하여 사전을 찾거나 영어를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또한 외래어 중에서 원래 [v]를 가진 것을 ‘ㅸ’으로 적는다고 할 때 ‘바이러스, 비타민, 비닐, 뷔페, 비데’ 등을 어떻게 정확하게 적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을 정확하게 적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언어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글자 생활만 더 힘들게 할 것이다. 즉 우리말에서 구별되지도 않고, 굳이 구별할 필요도 없는 것을 애써서 구별하여 적으려 한다면 오히려 혹을 떼려다가 혹을 하나 더 붙인 격이 되고 만다. 외래어 표기법은 한국인의 언어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한국인의 언어 직관에 따라, 여러 가지로 적을 수 있는 단어를 한 가지로 정하여 적음으로써 정확한 정보를 쉽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평범한 한국인이면 누구나 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말에서 음소가 아닌 [f], [v], [z] 등을 적으려고 지금 쓰지 않는 글자를 되살려 쓰기로 한다면, 새로운 문맹자를 많이 만들어 낼 것이며, 우리의 글자 생활도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외래어는 현행 24개의 글자로만 적는 것이 타당하고 충분하다.

다만 ‘외국어’ 표기는 ‘외래어’ 표기와는 다르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요즈음 세계 여러 나라에 한류가 유행하여 한글에 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는데 이에 따라 외국인이 자신의 말을 한글로 적고자 하거나, 혹은 지금껏 글자가 없던 언어를 한글로 적으려 한다면 경우에 따라서 [f, v, z] 등을 적을 글자가 반드시 필요해질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세종 임금이 이미 만들어 놓은 옛글자를 살려서 쓰거나 훈민정음 제자 원리를 이용하여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서 해결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한글은 표음력이 뛰어난 음소문자이므로 한글을 확장해서 사용함으로써 외국인이 자신의 언어를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러한 훈민정음식 표기는 ‘외래어’가 아니라 ‘외국인에 의한 외국어’ 표기에 국한되어야 한다.

정인지가 훈민정음 서문에서 훈민정음으로 바람 소리, 개 짖는 소리도 다 적을 수 있다고 하였지만 다른 모든 언어에서도 그러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 한글이 표음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한국어를 적을 때가 아니라 외국어를 적을 때 비로소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동일한 유형의 음소문자인 로마자가 세계의 1,500여 개 언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주원

김주원

한글학회 회장, 서울대 명예교수

kjw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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