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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글 역사 속의 결정적인 만남: 헐버트와 서재필, 그리고 주시경

우리 말글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을 꼽자면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한글 창제와 함께, 19세기 말부터 20세기의 전반기에 이루어진, 말글의 현대적 연구 및 표준화 사업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뒤의 일을 한글 창제와 맞먹는 업적으로 든 것...


우리 말글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을 꼽자면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한글 창제와 함께, 19세기 말부터 20세기의 전반기에 이루어진, 말글의 현대적 연구 및 표준화 사업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뒤의 일을 한글 창제와 맞먹는 업적으로 든 것은, 그 일이 엄혹했던 일제 치하의 갖은 고난 속에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그 결과가 우리 겨레의 삶에 미친 힘이 그 정도로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우리말에 대한 연구 업적들과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1933), 표준어 사정(1936), 『큰사전』 간행(1947~1957) 사업은 일제 치하에서 우리의 말과 글을 지켜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광복되면서 바로 우리말로 된 교과서로 교육을 시작할 수 있게 했다. 우리나라가 식민 지배와 6·25 전쟁의 참화를 겪고도 짧은 기간 안에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표준화된 우리 말글로 교과서를 만들고 그것으로 교육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말글을 현대적으로 연구하고 표준화하는 일을 시작한 인물이 주시경(1876~1914) 선생이다. 그는 ‘현대 국어학의 창시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이른 시기에 열정적으로 우리말을 연구하여 우리말 문법의 기초를 닦았고 강의를 통해 그 내용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제정, 사전 편찬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 일들을 시작하였다. 안타깝게도 그 일들을 모두 끝내지 못하고 요절했지만, 그의 학문과 정신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그 바탕 위에서 한글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사정했고 국어사전을 편찬해 내었으며, 국어학을 깊고 넓게 발전시켰다.

주시경 선생은 일찍이 여러 분야의 신학문을 공부했고, 우리 말글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본격적으로 우리 말글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그 표준화에 매진하게 된 계기는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와 서재필(1864~1951)을 만난 것, 특히 독립신문 간행에 참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갑신정변의 실패 후 모든 것을 잃고, 미국으로 가 각고의 노력으로 의사가 되어 있던 서재필이 고국의 근대화에 책임감을 느끼고 귀국(1895년 12월)하여, 가장 시급한 과제로 판단한 것이 국민을 계몽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수단의 하나로 결정한 일이 신문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국민들을 깨우치려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신문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바로 이런 신문을 간행하는 일을 추진했다. 『독립신문』(1896년 4월 7일 창간호 발행)이 최초로 한글 전용에다 띄어쓰기까지 한 형태로 발간되었던 것은, 한글 창제의 정신과도 통하는, 이 중요한 깨달음 덕분이었다. 그런데 서재필이 이러한 이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주시경이라는, 우리 말글에 대한 열정과 실력을 갖춘 젊은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발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시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감리교 출판사를 책임지고 있던 헐버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 시기(1896년 3월 무렵)에 이 출판사에는 헐버트의 가르침을 받았던 청년 주상호(주시경 선생의 본명)가 시간제 직공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상호가 독립신문사의 직원으로 발탁된 데에는 그의 능력과 사람됨을 먼저 안 헐버트의 추천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헐버트는 한글의 우수성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린 외국인이었다. 그는 1886년에 한국에 오면서부터 우리말과 한글을 열심히 배워 한글로 『사민필지』(1889년)라는 세계 지리 교과서를 쓸 정도가 되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특히 그는 배재학당에서 가르친 학생들 중에 가장 총명하고 성실했던 주상호와는 서양 학문과 우리말, 한글을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등 각별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또 그는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얻은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간행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주상호를 한글판을 담당할 사람으로 추천한 것이었다.

평소 우리말과 한글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 오던 주상호가 우리 말글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그 연구와 표준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 데에는, 이처럼 조선을 위해 헌신하고 있던 헐버트, 그리고 조선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 분투하던 서재필을 만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주상호는 서재필에게 세계 지리와 역사를 배우고 그가 주도한 협성회와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애국 계몽사상을 키웠다. 무엇보다도, 그는 『독립신문』을 간행하면서, 우리말 문법과 맞춤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는데, 그러한 필요에 의해 조직한 것이 ‘국문동식회’(1896년 5월)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연구 모임이었다. 한글 맞춤법의 기초가 세워진 것도 바로 이 모임에서였다. 이후 그는 줄곧 우리말에 대한 연구와 강습을 왕성하게 진행하면서, 1908년에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최초의 국어학 연구 단체인 ‘국어연구학회’(뒤에 ‘조선어학회’를 거쳐 ‘한글학회’가 됨.)를 만들었고, 1911년에는 ‘조선광문회’ 안에 ‘말모이편찬실’을 만들어 국어사전의 원고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국어문법』(1910), 『말의소리』(1914) 등의 저술로 명실공히 우리나라 현대 국어학의 기초를 닦았다.

주시경 선생의 우리말 연구는 과학적이었을 뿐 아니라, 말과 겨레, 나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상 위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어문민족주의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가 우리 말글의 표준화와 관련하여 이룩한 성과들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각종 어문규범의 기초가 되었다. 이처럼 주시경이라는 한 개인이 우리 말글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그런데 이분이 이렇게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 자신의 역량과 노력 외에 서재필과 헐버트라는 위대한 인물들과의 만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문규

이문규

한글학회 이사, 경북대 교수

lemok@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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