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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 110주년에 다시 생각하는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서거 110주년을 맞아 다시 생각하면, 선생은 선구적 국어국문·한글학자임과 동시에 사회사상가·민족운동가, 참으로 나라와 겨레를 사랑한 위대한 애국자이셨다. 선생은 민족의 본질은 ‘언어공동체’라고 정의하고, 언어가 오르면 민족도...


주시경 선생 서거 110주년을 맞아 다시 생각하면, 선생은 선구적 국어국문·한글학자임과 동시에 사회사상가·민족운동가, 참으로 나라와 겨레를 사랑한 위대한 애국자이셨다.

선생은 민족의 본질은 ‘언어공동체’라고 정의하고, 언어가 오르면 민족도 오르고 언어가 내리면 민족도 내린다고 보았다. 그리고 문자는 언어를 담는 그릇· 기관으로서, 언어와 동반·동행한다고 설명하였다. 선생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정음문자는 세계 최고의 우수한 배우기 쉬운 문자인데, 이것을 전용하지 않고 우리말을 제대로 적지 못하는, 가장 어려운 남의 나라 한문자 하나 배우기에 어린 청소년 학생들을 몰아넣어서는 미래에 희망이 없고 나라는 남에게 삼킴을 당한다고 설명하였다.

주시경 선생은 이에 배재학당 학생시절부터 아직 존재하지 않는 우리말 문법 연구를 시작하였다. 영어·중국어·일본어를 배우고 수리학(특히 인수분해와 기하학)·자연과학의 원소론을 배워 참조하며, 우리말과 정음문자의 구성 원리를 정립하는 연구를 하면서, 온 국민을 한문자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국문(한글) 전용을 제창하기 시작하였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국문판과 영문판 합쳐 창간할 때, 주시경은 처음부터 참가하여 ‘국문판 조필’(사장 서재필 다음의 위치)을 맡았다. 독립신문의 영문판과 사설은 서재필이 맡고, 국문판은 선생이 맡아 순국문(한글 전용)으로 편집해서 발행하였다.

선생은 이때 독립신문사 안에 ‘국문동식회’(1896)를 조직하여 사원들과 함께 국문을 동일한 문법 방식으로 사용하는 국문법 연구를 실행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연구단체이다. 이때 연구의 성과는 1898년 『국어문법』으로 원고가 완성되었고, 1906년에 『대한국어문법』으로 등사판으로 발행되었다.

선생은 이 시기에 『독립신문』에 두 차례 두 편의 「국문론」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선생이 세상에 발표한 최초의 논문이다. 선생은 「국문론」(1897)에서 일생을 한문만 공부해도 다 배우지 못하고 마는 한문 사용 폐습을 철폐하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국문을 전용하여 남는 시간을 나라의 발전에 필요한 ‘실상 학문’을 공부해 나라를 지키자고 절규하였다. 선생은 이 논문에서 국문에 대해 (1) 국문 전용을 실행할 것, (2) 국문 띄어쓰기를 실행할 것, (3) 국문법을 만들고 맞춤법을 통일할 것, (4) 국어사전을 편찬할 것, (5) 국문 가로쓰기를 실시할 것, (6) 쉬운 국어를 써서 언문일치를 실행할 것 등의 정책을 실행하도록 촉구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과 실행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1905년 11월 일본 제국주의가 을사조약을 강제하여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에 간섭해 들어오자, 선생은 나라의 위기를 더욱 절감하였다. 아직 통일된 국어문법을 확립하지 못한 단계에서 나라가 망하고 일제가 일본어를 강제 학습시키면서 대한의 국어·국문(한글)이 쇠약해지고 소멸당하면 나라와 겨레가 영원히 없어지게 될 위험을 크게 염려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되기 직전 짧은 기간이라도 국어문법을 정리하여 국민과 청년·학생들에게 정립된 국어문법과 애국심을 교육시켜 놓으면, 민족을 존속시키면서 언젠가 애국적 청년·학생들이 성장하여 반드시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 독립을 쟁취할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에 선생은 당시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동지들과 함께 적극 참가하였다. 선생은 우선 서울 시내의 중학교들에 국어문법 과목을 신설하도록 요청해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1주일 평균 40시간씩 강의했는데, 이것은 한 개 학교 안에서가 아니라, 서울 시내 흩어져 있는 중학교들에 발로 걸어 돌아가면서 강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무리였다. 선생은 시간에 대기 위해 점심을 거르기 일쑤였고, 교무실에 들를 시간이 없어서 강의실에 직행하기 일쑤였다.

밤에는 호롱불 밑에서 연구에 몰두하여, 『대한국어문법』(1906), 『국문연구안』(1907), 『국어문전음학』(1908), 『국문연구』(1909), 『국문초학』(1909), 국어사전 편찬을 위한 1910년경부터의 『말모이』 작업, 『말의 소리』(1914)의 연구 업적을 내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문법 체계인 ‘주시경 문법 체계’를 확립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보성학교에 ‘조선어강습원’을 차리고 일요일마다 무료 강의를 담당하였다. 이 강습에는 한성사범학교 학생들을 비롯하여 서울 시내의 많은 중학생들이수강하였다. 선생은 과학적 국어문법을 가르침과 동시에 잃어버린 조국을 다시 찾도록 애국심을 고취하고 교육하였다. 어디서 일하든지 간에 그의 제자들은애국자가 되었다. 선생은 과로가 누적되어 뜻밖의 체증으로 1914년 7월 27일 39세의 젊은 나이로 위대한업적을 남기고 서거하였다.

선생이 1908년에 창립한 ‘국어연구학회’의 활동을 이어받아 선생의 제자들은 일제의 탄압을 무릅쓰고 1921년 12월 ‘조선어연구회’ 조직을 확대·강화하고,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개칭하면서 국어국문 연구를 계승했으며, 1930~33년에는 주시경 문법 체계로 「한글맞춤법통일안」 등을 제정 발표하였다. 1945년 광복 후, 남한에서는 선생의 제자 최현배 등과 한글학회가 주동하여 ‘주시경 문법 체계’가 대한민국의 공식 국문법이 되었다. 북한에서는 선생의 제자 김두봉 등이 주동하여 역시 ‘주시경 문법 체계’가 공식 채택되었다. 남·북이 분단되어도 국어문법은 주시경 체계로 통일된 것이다. 비록 지금은 남·북이 분단되어 있지만, 통일된 우리말과 ‘주시경 문법 체계’는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질 민족 통일의 가장 튼튼한 기반과 동력이 될 것이다. 선생은 우리 겨레에게 독립과 민족 통일까지도 가르치고 보장해 주신 겨레의 영원한 위대한 스승이시다.



신용하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yhshin3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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