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인천강지곡(작가: 김내혜) 2024년 5월 15일은 부처님 오신 날과 세종대왕 나신 날이 겹치는 겹경사 날이다. 부처님 오신 날만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지만 올해에는 겹치다 보니 더 편하게 세종 나신 날도 함께 기리게 되었다. 마침 세종이...
▲ 월인천강지곡(작가: 김내혜)
2024년 5월 15일은 부처님 오신 날과 세종대왕 나신 날이 겹치는 겹경사 날이다. 부처님 오신 날만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지만 올해에는 겹치다 보니 더 편하게 세종 나신 날도 함께 기리게 되었다. 마침 세종이 직접 펴낸 불교 문헌이자 한글 문헌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있어 그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세종은 훈민정음 해례본 간행(1446년) 6개월 전에 승하한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에게 『석보상절』을 짓게 했고 1447년에 완성됐다. 이를 보고 세종이 직접 지은 불교 노래를 모아 놓은 책이 『월인천강지곡』이다. 책 제목은 “천 개의 강물에 비친 달의 노래”라는 뜻이지만, 속뜻은 ‘부처가 온 세상을 교화하는 것이 달이 천 개의 강을 밝게 비추는 것과 같다’라는 뜻이다. 곧 ‘달’은 부처님 또는 ‘부처님 말씀’으로 내용은 부처님을 위한 찬불가이지만 훈민정음으로 적은 문헌이다 보니 부처님 말씀을 통해 훈민정음이 널리 퍼지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원래 이 책은 상·중·하 세 권에 580여 곡의 노래가 실린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상권에 실린 194곡만이 남아 있다. 다행히 『월인천강지곡』을 재수록한『월인석보』에 있는 것까지 합치면 440곡이 남아 있는셈이 된다. 다만 『월인석보』에 남아 있는 것은 한자를한글보다 더 크게 바꿔놓아 세종 때의 월인천강지곡을 온전하게 표기하지는 않았다.
세종이 이 책의 훈민정음 관련 목적이 있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볼 수 있는 역사적 맥락은 분명하다. 첫째는 『월인천강지곡』이 『훈민정음』 해례본 간행 직후에 발간된 대표적인 한글 문헌이라는 점이다. 해례본 간행 이후 나온 책으로는 『용비어천가』(1445~1447), 『동국정운』(1448) 등도 있지만 『용비어천가』는 125수 시가만 국한문 혼용체로 썼고 책 대부분의 주석은 한문으로 되어 있다. 또한 『동국정운』은 한자음을 한글로 적은 책이다. 그렇다면 한글을 시가나 문장 차원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책이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인 것이다. 특히 『월인천강지곡』은 한글을 두드러지게 써서 한글 쓰임새를 잘 보여준 자료이다. 이로 보아 두 문헌이 훈민정음 학습이나 보급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두 책을 함께 엮은 『월인석보』 권1의 앞머리에 훈민정음 언해본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둘째는 그동안 많이 언급되어 온 것처럼 『월인천강지곡』은 한글보다 한자를 더 크게 쓴 『석보상절』이나 한자와 한글을 섞어 쓴 『용비어천가』와는 달리 한글을 한자보다 훨씬 크게 앞세워 썼다는 점이다. 한자만을 참 글자로 알았던 시대에 한글이 당당한 주류 문자로 쓰일 수 있음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
▲ 오른쪽부터 석보상절(1447), 수양대군 편 / 월인천강지곡(1447-), 세종 / 월인석보(1459), 세조 편
『월인천강지곡』에 대한 이러한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님은 오늘날 대다수 언론이 한글전용을 거부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된다. 『월인천강지곡』의한글·한자 병기는 단순한 표기가 아니라 오늘날 괄호 병기 한글전용체와 같다. 한글전용을 법으로 명시한 국어기본법이 제정된 지 19년, 한글 반포 578주년이 되는 2024년에조차 대다수 보수 신문들이 한글전용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나라 이름과 대통령 이름조
차 한자로 적고 있는 마당에 15세기에 한글전용체를선보였다는 것은 분명히 ‘주류 문자의 꿈’이 담겨 있는것이다.
세종의 그러한 꿈은 창제·반포자로서 어쩌면 당연한 꿈이었겠지만 이미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정인지의 입을 빌려 당당하게 밝혀 놓았다. 훈민정음이 학습, 학문 분야와 실용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더욱이 『월인천강지곡』에는 그 당시 일반 표기와는 달리 오늘날 맞춤법의 핵심인 ‘형태음소표기’가 적용되었는데, 이 또한 세종의 굳건한 의지로 볼 수밖에 없다.
그동안 크게 주목하지 않은 점도 있다. 『월인천강지곡』이 한자보다 한글을 더 큰 금속활자로 만든 최초의 책이라는 점이다. 올해가 세종이 개량한 금속활자 ‘갑인자’를 만든 지(1434년) 590주년이 되는 해라서 더욱 의미가 깊다.
금속활자로서의 한글 글꼴은 해례본에서 나무판에 새겨 선보인 한글보다 더 정교하게 금속활자로 만 들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금속활자는 해례본 직후 나온 『석보상절』, 『동국정운』 등에서도 독자적인 금속활자로 주조되었지만, 한자보다 더 큰 한글 글꼴은 세종 의도가 더 반영된 독자적인 글꼴이 된 셈이다.
훈민정음에 대한 세종의 간절함과 열망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조선은 억불숭유 정책을 기반으로 한 왕조이기는 하였지만, 불교는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일반 백성들의 생활 종교이었다. 세종은 이러한 당시 상황에 주목하였다. 『월인천강지곡』은 표면적으로는 소헌왕후 명복을 빌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백성들의 생활이요 종교였던 불심에기대어 훈민정음이 널리 퍼져나가 한글이 한자와의공존을 뛰어넘어 당당한 문자로 우뚝 서는 꿈을 담았을 것이다. 아쉽게도, 1450년 세종 승하 후 조선 시대내내 훈민정음은 주류 문자가 되지 않았다. 1894년에고종이 한글을 한자보다 더 중요한 공식문자로 내각에 선언하고 1895년에 온 나라에 반포하지만, 실제로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전 세계의 한글, 한국어 배우기 열풍을 보면 세종의 꿈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오히려 더 크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김슬옹
한글닷컴(Haangle.com) 연구소장/편집위원, 세종국어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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