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월파 서민호 선생이 세상을 뜨신지 50주기가 되는 해이다. 2023년은 월파 탄생 120주년이었다. 전국 단위의 행사를 하지는 못했지만,출생지 전남 고흥 동강에서 의미 있는 행사를 열었다. 2024년에는 더 많은 분들...
2024년은 월파 서민호 선생이 세상을 뜨신지 50주기가 되는 해이다.
2023년은 월파 탄생 120주년이었다. 전국 단위의 행사를 하지는 못했지만,출생지 전남 고흥 동강에서 의미 있는 행사를 열었다.
2024년에는 더 많은 분들이 월파 서민호를 기억할 수 있게 할 생각이다.
월파 서민호. 60대 후반 이후의 기성세대에게는 익숙하지만 신세대에게는 낯설 것이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옆에 우뚝 서 있는 ‘조선어학회 한말글수호 기념탑’의 33인 선열 명단에 들어 있는 분이지만 서른 세 분의 이름을 죄다 꿸 수는 없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 영화 <말모이>에서도 33인이 모두 등장하는 것이 아니어서 월파의 존재를 쉬이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월파를 만날 수 있다. 월파가 살았던 시대는 제국주의 일본이 우리 민족을 통치했으며, 또 다른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이 우리 겨레를 분단시킨 민족 수난기였다.
이 속에서 살아온 월파의 삶은 그대로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였다.
월파 서민호. 그는 겨레가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식민 통치하였지만. 대지주의 아들로서 부를 누리며 향락을 누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누리지 못한 일본과 미국 유학을 다녀왔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그는 고학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식민지하에서 조선 최고 수준의 지식층이 되었지만 권력을 쫒는 부나비가 아니었다.
그가 있는 곳은 언제나 민족운동의 한복판이었다.
10대에는 서울에서 보성고보에 다니며 3·1운동에 참여하고, 임시 정부 소식을 국내에 알리는 ‘반도 목탁’이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돌렸다. 이로 인해 10개월을 복역해야 했다.
20대에는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하면서 유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다. 일본 와세대 대학에 다닐 때 우에노 공원에서 3·1절 5주년 기념식을 2천 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었다. 40여 명이 검속을 당했는데 주모
자 4명 중 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웨슬리언 대학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에 다닐 때에도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재미 동포 사회의 분열을 극복하고자 3·1절 행사를 동지회와 국민회
가 함께 행사를 치르도록 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장덕수 등과 『삼일신보』를 펴내기도 했다.
30대에는 귀국 후 벌교에서 부친의 사업을 물려받아 남선무역을 운영하며, 교육·문화 운동을 펼쳤다.
월파의 선친 죽파 서화일은 고흥에 살면서 신흥 상업도시인 벌교로 진출하여 상업과 간척으로 돈을 벌었던 대지주였다.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남선무역을 키워나가면서 지역에서 최고의 학력을 가진 신유지가 되었다.
송광사가 처음 세운 송명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였으며, 반도 가극단을 조직하여 우리 문화를 지키고자 했다.
미국 유학 중 이극로를 만나면서 우리글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던 월파는 김양수의 권유를 받자 1937년에 170원, 1938년에 160원을 후원하였다.
1942년 일제가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을 때, 월파는 1943년 3월 6일 서울에서 종로 경찰서의 형사에게 검거되어 함경도 홍원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이후 약 7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함흥형무소로 이감된 뒤에, 기소유예로 1943년 9월 18일에 석방되었다.
해방을 맞은 40대에도 월파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영어를 잘 구사하고, 미국을 아는 인물로 인정을 받아 미군정기에 광주시장과 전라남도지사를 맡았다.
남북 대립과 우리 안의 이념대립이 나타나며 반공 정치인이 되었다. 40대 후반에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이승만과 정면으로 대립하며 50대 황금 시기에 무려 8년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50대 말 4·19혁명 이후 국회 부의장이 되어 국제 외교무대에서도 활약한 그였지만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국회의원 노릇도 쉽지 않았다.
1965년에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며 국회의원을 사퇴하였다.
60대인 1970년대에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혁신 정당을 만들어 보기도 했고, 통일에 대해 방안을 제시해 보기도 했지만
국민과 권력은 월파의 앞선 주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했다.
1971년 마지막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1973년에는 정계를 은퇴하고서 통일연구협회를 만들어 60대 말과 70대 초의 열정을 불살랐다.
그의 남북 교류 주장은 박정희정부의 남북 대화로 빛을 보았지만, 통일은 여전히 권력의 것이었다.
이에 월파는 ‘통일연구협회’를 만들어 정파를 초월하여 회원을 모집하고, 통일문제 전문가를 모셔서 깊이 있는 학술 토론회를 이끌었다.
그 결과를 모아 『통일연구』라는 기관 잡지를 펴내어 널리 배포했지만, 총 5권의 책자를 모두 보유하고 있는 단 한 곳도 없다. 고흥의 월파 기념사업회가 2023년에 국회도서관에서 4권의 책을 찾아내고,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국토통일원의 협회 관련 자료를 찾아내서 『월파의 삶과 그가 꿈꾼통일』을 펴냈다.
해방 후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와 최전선에서 맞서는 동안 월파는 세상 사람들에게 반독재 투쟁가로서 널리 인식되었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 독립운동가, 교육운동가이자 민족문화운동가로서, 민간통일 운동의 선구자로서,
더 나아가 한국 체육의 진흥자, 국가 폭력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의 선구자로서도 그의 삶을 재조명했으면 좋겠다.
이를 바탕으로 대전 현충원의 묘비명도 그의 삶에 맞게 다시 새기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박병섭
월파서민호선생기념사업회 이사
bsp8651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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