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은 이론적 바탕 위에 서야 하고, 그 이론은 철학적 언어관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 만일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갖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학문으로 이루어지기 어렵거나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학문의 산맥을 잇는 바탕이 되기는 어렵다....
"학문은 이론적 바탕 위에 서야 하고, 그 이론은 철학적 언어관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 만일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갖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학문으로 이루어지기 어렵거나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학문의 산맥을 잇는 바탕이 되기는 어렵다.”
─김석득 선생 지은 『우리말 연구사(1983)』 머리말 중에서-
한글학회 부회장을 지내신 갈음 김석득 선생께서 지난 7월 21일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은 1931년 4월 충북 괴산군 칠성면 갈읍리에서 태어나시고 칠성 초등학교, 괴산 중고등학교를 다니셨다. 고등학교 학생 시절 6.25 동란을 맞아 학도병으로 복무하시고, 1952년 연희대학교 문과대학에 입학하여 1956년 졸업, 1956년~1968년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 졸업(석사)하시고, 1968년~1970년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졸업하셨다. 1958년부터 4년간 한양대학교 교수로 근무하셨고, 1962년부터는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근무하셨다. 연세대에서 한국어학당/외국어학당 학감, 국학연구원 원장, 교수평의회 의장, 문과대학장, 대학원 원장, 교학부총장으로 봉사하셨다. 대학 일 외에 한글학회 이사, 부회장, 문교부 국어심의회위원, 한국언어학회 이사와 회장, 국어학회 이사, 외솔회 이사, 부회장, 회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봉사하셨다. 1980년부터 2년 간 프랑스 파리 7대학 동양학부 박사과정 수료, 동양학부 교수로 봉사하셨고, 해외 동포 교육과 한국학 관련 특강 등을 통해서 국어학의 연구 성과를 해외에 알리는 데도 힘을 쏟으셨다. 김석득 선생의 호는 ‘갈음’인데, 한학을 하신 선생님이 선생의 고향 갈읍리 발음을 따서 ‘칡 갈(葛)’에 ‘그늘 음(陰)’, 즉 칡덩쿨이 가려주는 여름의 시원한 그늘 같은 삶을 살라는 의미로 ‘갈음(葛陰)’이라고 하면 좋겠다 해서 그대로 쓰기로 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선생께서는 그 의미대로 덩굴을 이루시고, 그 그늘에서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는 업적을 남기셨다. 글머리에 인용한 대로 선생께서는 우리 말글 연구를 탄탄한 이론과 철학 위에 세우고 싶어 하셨다.
20세기 구조주의를 공부하시고, 『국어구조론』(1971)을 비롯해서 대표 저서인 『우리말 연구사』와 『우리말 형태론(말본론)』 등을 내셨다. 이 책들을 보면, 선생께서는 평생 국어학 연구의 초점을 우리말 특성을 고려
해서 형태론 연구에 두셨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연구사』에서는 세종 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학자들이 갈고 닦은 우리 말글 이론이 특출하고 철학이 심오하며 사상이 뿌리 깊고 튼튼함을 감탄하셨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시기부터 정인지를 비롯한 학자들의 언어관과 언어 이론을 분석하고, 조상들의 언어관과 사상이 세계 언어학사에서도 사상과 철학의 맥이 닿을 수 있음을 밝히셨다.
15세기 『훈민정음 해례』의 정인지 등 학자들의 역(易) 사상과 철학을 분석하시고, 16세기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1527)의 범례와 국어교육,
17세기 최석정의 『경세훈민정음도설(經世訓民正音圖說)』(1678),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1750),
18세기 이사질의 『훈음종편(訓音宗編)』과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
19세기 유희의 『언문지(諺文志)』(1824)에 나타난 언어관과 철학에 대해서 시대별로 분석하여 우리 말글 사상과 철학이 면면히 이어져 왔음을 분명히 하셨다.
이런 흐름은 갑오경장 이후 최광옥의 『대한문전(大韓文典)』(1908), 유길준의 『대한문전(大韓文典)』(1909)에 이어지고 있음을 꼼꼼히 확인하셨다.
이런 언어 사상과 철학은 주시경 선생의 근대 국어학을 확립하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그 후 김두봉 선생의 『조선어말본』(1916), 『깁더 조선말본』(1922), 김윤경 선생의 『조선말본』(1926)과
『한글말본(朝鮮語文法)』, 『나라말본』(1948)의 분석주의, 정열모 선생의 『신편 고등 국어문법』(1946)의 종합주의언어 사상과 체계,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1937)(1961)의 준종합주의 언어관과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밝히셨다.
당시 정통적 말본 체계와 다른 특성을 보인 박승빈 선생의 『조선어학(朝鮮語學)』(1935)의 극단적 분석주의, 이숭녕 선생의 『중등 국어문법』(1956), 『고등국어문법』(1956), 『중세 국어문법』(1961)
에 드러난 종합주의를 정리하고, 허웅 선생의 『국어음운론』(1958), 『언어학개론』, 『우리옛말본』(1975), 『국어학』(1983)에 이르기까지 우리 말글 연구가 어떤 사상과 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는지 정리하셨다.
김석득 선생의 학문적 이론과 체계가 가장 잘 드러난 책은 『우리말 형태론(말본론)』(1992)이다.
“우리말은 ‘덧붙는 말(첨가어, 교착어)’이기 때문에 우리말 연구에서는 ‘형태론’의 비중이 매우 크다. 1950년
대 후반기부터 구조언어학이 우리말 연구에 대한 새로운 눈과 새 이론을 제시해 줌으로써 음운론, 통어론과
더불어 형태론에 비상한 관심을 갖게 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뒤 오늘날까지 나라 안팎의 연구
경향이 통어론에 치우친 느낌이 없지 않다. 이는 상대적으로 형태론 연구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중략) 이 글의 목적은, ‘형태소 및 형태소 통합의 연구라는 형태론의 뜻매김에 따라, 형태론을 형태통어적 차원에서 연구함으로써 우리말의 말본 체계를 세우려는 데 있다.”
선생께서는 우리말의 형태통합론에서 굴곡범주(어미)와 준굴곡범주(조사)의 처리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루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특히 통어론에서 다루는 마침법, 높임법, 피사동법, 부정법 등 통어론의 범주들이 이들 형태소 범주들과 관련되어 형태론을 통사론과 함께 연구해야 함을 문법 범주별로 자세히 밝히셨다.
갈음 김석득 선생께서 돌아가셔서 주시경, 최현배, 허웅, 김석득 선생으로 이어지는 서구 이론을 배우면서도
우리말 중심의 언어 사상과 철학을 바탕으로 국어를 연구하려는 학맥이 또 하나의 굽이를 맞이하게 되었다.
평생 학자로서 선생께서 추구하셨던 학문적 자세, 즉 외국의 학문 이론을 배우더라도 우리말 특성에 맞는 학문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우리말글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오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이창덕
외솔회 회장
leechang@ginu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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