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본(讀本)은 편찬자가 ‘정수’라고 여기거나 ‘모범’이 될 만하다고 판단하는 글들을 뽑거나 지어서 엮은 책이다. 읽을 만한 본(本), 즉 기준 혹은 전형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표준적 지식 텍스트가 되고, 무엇을 뽑는지 누구를 위해 묶는지...
독본(讀本)은 편찬자가 ‘정수’라고 여기거나 ‘모범’이 될 만하다고 판단하는 글들을 뽑거나 지어서 엮은 책이다.
읽을 만한 본(本), 즉 기준 혹은 전형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표준적 지식 텍스트가 되고, 무엇을 뽑는지 누구를 위해 묶는지에 따라 텍스트의 유형이 다양하다.
그 가운데 교육을 목적으로 가르칠 만한 글을 모아 엮은 것은 교과서로서의 위상을 지닌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과서는 대한제국 학부가 개발·편찬한 『국민소학독본』(1895)이다.
고종과 대한제국의 근대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이 독본은 새로운 문명과 지식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국어, 문학, 역사, 지리 등 근대 교육의 표준적 지식이 섞여 있는 모습이지만 여러 단원으로 구성된 교재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어 교과서의 기원으로 여긴다.
환산 이윤재는 1931년 『문예독본』을 출간한다.
『문예독본』은 당시의 유명한 문학자, 어학자, 사학자들이 쓴 문학 작품, 논문, 해제 등을 엮은 책으로, 중등학교 수준의 읽기 교재로 편찬되었다.
일제강점기 제도 교육에서 사용했던 『조선어 독본』, 즉 당시 일제가 만든 초중등 학교의 ‘국정 교과서’와 달리 출판시장을 중심으로 인기가 높았던 ‘민간교과서’였다.
이윤재가 1932년 창간된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 편집에 참여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34년 1월호부터는 그가 직접 주간을 맡기도 하였는데, 당시 그의 저서 『문예독본』의 인세로 기관지를 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문예독본』은 1910년 휘문의숙이 발행했던 『고등소학독본』과 비슷한 이유로 한때 일제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문예독본』에는 모범이 될 만한 동화, 시조, 시, 소설, 기행문, 서간문 등과, 사화, 논문(논설문), 설명문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특히 문학 작품의 비중이 높은데, 책의 예언에 소개된 바에 의하면 이태준, 변영로, 이은상, 주요한 이 작품 선택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태준은 조선어학회 표준어 사정에 참여했었고, 변영로는 이윤재와 함께 계명구락부의 사전편찬에 참여했다.
이은상은 이윤재에게 국사와 국어를 배운 제자였고, 주요한은 조선어학회 사전편찬위원회 준비위원이었다.
이렇듯 『문예독본』의 기저에는 ‘조선어학회’, ‘수양동우회’ 같은 민족주의 진영과 인맥이 깔려있다.
총 176쪽 분량의 이 책은 39단원(상권 23, 하권 16)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은 문학 작품의 비율이 높고, 하권은 시조나 문학에 대한 이론을 펼치는 글을 싣고 있다.
상권보다 하권의 수준이 높아, 교육 수준을 조절하는 교과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1894년 이후 신문학의 성과, 특히 1910~20년대 쏟아진 우리 말글로 된 문학 작품 및 관련 논의를 집중적으로 구성하였다.
『문예독본』에는 당시의 독본들에 흔히 수록되었던 번역작품이나 번안 작품이 없다. 제도권 국정 교과서와가장 큰 차이점이다. *<사진1,2> 참조
▲『문예독본』 상권, 표지(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진2>『문예독본』 상권, 판권지(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이윤재의 『문예독본』은 일제강점기 국정 교과서류와 다른 몇 가지의 특색이 있다.
『문예독본』에 실린 작품은 부록으로 실린 ‘한글 철자법 일람표’에 따라 철자, 띄어쓰기,
구두점까지 이윤재가 직접 교감한 것이다.
이 철자법은 19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발표되기 이전 이윤재 개인이 만들어 놓았던 것이어서 1933년의 것과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윤재가 19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드는 데 관여하였으므로 『문예독본』에 실린 일람표도 된시옷이나 아래아의 처리,
겹받침 사용 문제, 한자음 문제 등에서 조선어학회의 기준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이윤재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형태의 표기법을 보급하고자 자신의 철자법에 맞추어 『문예독본』에 실린 글들을 수정해 두었다.
말하자면, 『문예독본』은 어문민족주의자 이윤재가 당시 민족주의 문사들의 주요 작품을 근대 국어의 원칙과 기준에 맞게 교정, 편찬한 최초의 민간 문학 교과서였던 것이다.
한편, 이윤재의 『문예독본』은 근대 문학 교과서의 원형뿐만 아니라 문학 정전 형성과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의미도 있다.
『문예독본』의 체재와 내용은 해방 후 1946년 방종현·김형규의 『문학독본』에서부터 다양한 문학 독본류의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그 흔적은 전쟁 이후까지 이어진다.
모기윤이 펴낸 『(고금명작) 문장독본』(1953)과 정인승이 백철, 이병기와 함께 낸 『표준 문예독본』(1955)은 고등학교 국어과의 현대문 보충교재로 쓰였다는 점에서
이윤재의 『문예독본』과 비슷한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문예독본』의 체재와 매우흡사하다.
국어 교육사 측면에서 보면, 소위 6차 교육과정까지 교과서에 흔히, 그리고 꾸준히 수록되곤 했던 작가와 작품들,
예컨대 현진건의 ‘불국사’ 관련 기행문, 변영로의 ‘백두산’ 관련 시조, 방정환의 ‘어린이’ 관련 동화,
나도향의 ‘달’을 제재로 한수필, 이태준의 ‘봄’을 소재로 한 소설 등은 기실 1931년 출간한 『문예독본』에 최초로 엮였던 것들이다.
말하자면, 이윤재의 『문예독본』이 뽑고 엮은 근대 문학의 밑그림은 해방 이전 근대 문학의 성취를 오롯하게 반영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정식 교육과정에 의한 발간한 국정 교과서로 이어짐으로써 오늘날 교육 정전의 주춧돌을 놓았던 셈이다.
구자황
숙명여대 기초교양학부 교수
pakua@sookmy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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