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어원에서 2008년 12월 23일에 발표한 한국인 문해력 조사에 따르면, 19세 이상 79세 이하 성인 의 98.3%가 문해자이고, 1.7%만 비문해자였다. 현대한국에서 한글은 국민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국민 문자가 되어 있다. 오늘날...
국립국어원에서 2008년 12월 23일에 발표한 한국인 문해력 조사에 따르면, 19세 이상 79세 이하 성인
의 98.3%가 문해자이고, 1.7%만 비문해자였다.
현대한국에서 한글은 국민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국민 문자가 되어 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세종의 한글반포 후 많은 백성들이 한글을 배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대부분의 한국인은 한글을 몰랐다. 한글은 과연 언제부터 국민 문자가 되었을까?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효율적 식민 통치를 위해 조선의 각종 현황을 조사하였다. 조선인의
한글 문해율도 조사 대상이었다. 조사 결과 1930년에 조선인의 한글 문해율은 15.44%로 나왔다. 남자의 문해율은 25.41%, 여자는 6.02%였다. 전체 인구의 84.56%는 문맹인 셈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도 못 되는 1930년에 100명 중 16명만 한글 문해자이고, 나머지 84명이 문맹자였다는 통계이다.
조선총독부가 낸 통계 수치에는 신뢰도 문제가 있다. 일제는 그들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은 미개한 나라이고, 일본이 조선을 근대 문명국가로 만들어 준다고 선전하였다. 이 점을 감안하여 1930년의 한글 문해율 15.44%에 곱하기 2를 하여도 문해율은 30%를 살짝 넘을 뿐이다. 절반은 주먹
구구인 이런 방식으로 보더라도 1930년의 한글 문맹율은 70%에 육박한다. 어떻게 되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세종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세종이 지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우민’(愚民)이라고 표현한 백성은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일상생활에서 편히 쓸 수 있도록 정음28자를 창제했다. 세종은 이 창제 목적을 『훈민정음』 서문에 공표해 놓았다. 세종은 창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관문서 작성을 담당한
하급 관리 선발 시험에 한글 쓰기 시험을 부과했다.
이 시험에 합격해야 본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응시자는 정음 28자의 자형과 합자법을 익혀야 했다.
최만리 등 집현전 학자 7인은 상소문을 올려 이두문서를 한글 문서로 바꾸려는 시도와 한자음 번역
등 세종의 어문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세종은 이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훈민정음 반포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음 반포 후 세종은 3년 6개월 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두 문서를 한글 문서로 바꾸려 했던
세종의 정책은 계속 시행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이 정책만 중단된 것이 아니었다.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만든 한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정책도 시행되지 않았다.
한글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도 없었고, 가르치는 제도도 없었고, 가르치는 선생도 없었다. 최세진이 만든 한글 학습 자료 「언문자모」는 한
문으로 쓰여 보통 백성들이 읽을 수 없었다. 이런 상태가 갑오개혁(1894) 때까지 계속되었다. 근 450년 동안 한글은 국민 문자가 되지 못하였다. 백성을 위한
한글이 아니라 양반가 부녀자와 아동을 위한 한글로
갇혀 버렸다.
양반가에서는 아이들에게 사사롭게 한글을 가르쳤다. 「언문자모」에서 설명한 자모자 이름(ㄱ기역, ㄴ니
은 등)과 자모자를 합성한 ‘가갸거겨’행 음절자 행렬을 더 확장하여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평민 이
하의 하층민에게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한글 음절자 행렬표를 『동몽선습』이나 『천자문』 책머리에 붙여 널리 알리지도 않았다. 평민 이하의 하층민들은
한글을 배울 기회는 물론 학습 자료를 구할 길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중의 하층민인 궁녀가 한글을 배워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기도 했고, 하층민이
조정 관리를 비난하는 글을 한글로 써서 투서하기도
했다.
세종 31년(1449) 10월에 정승 하연(河演)을 비방하는 한글 벽서 사건이 발생했다. 성종 16년(1485)
7월에는 서울 시전의 상인들이 상가를 옮기려는 정책에 불만을 품고 판서와 참판을 비방하는 글을 한
글로 써서 투서하였다. 의금부에서 철물전과 면주전
상인 등을 잡아들여 투옥하자 그 수가 79명이나 되었다. 투옥된 사람 중에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자 16
인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풀어 주었다. 79명 중 16명이 한글 문해자였으니 20.25%에 달한다. 이 중에는
신분이 노비이면서 언문을 잘 쓴 유막지라는 자도 있었다. 이들은 상업에 종사한 하층민이었다. 장사에
는 기록이 필요하였고, 이들은 한글을 배워 거래 기록에 썼던 것이다. 개화기 즈음에 조선을 여행한 외국인이 하층민도 한글을 아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이들이 만난 조선인들이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평민 이하의 하층민은 과연 어떻게 한글을 배웠을까? 19세기 후기에는 한문으로 쓴 최세진의 「언문
자모」보다 훨씬 쉽고 간편한 한글 학습 자료가 간행
되었다. 반절표라 불리기도 한 14행의 한글 음절표가 그것이다. 기축신간반절 등 여러 한글 음절표가
낱장에 인쇄되어 저렴한 값으로 팔렸다. 그런데 낱장 한글 음절표의 기원은 해인사 도솔암판 『일용작
법』(1869년)의 권두에 실린 「언본」에 있다. 추담당 정
행대사(秋淡堂 井幸大師)가 개편한 『일용작법』의 「언본」이 방각본 인쇄업자의 손에 들어가 여기에 생활
정보를 추가한 것이 낱장 음절표이다. 이제 누구나
쉽게 한글 학습 자료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위해 만든 문자로서 민주성이란 보편 가치를 지니고 태어났다. 이 민주성이 제대로 실현된 때는 20세기 후반기이다. 광복 후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국가는 투표를 시행해야 했고, 여기에
는 한글을 아는 국민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국가가 한글 교육의 주체가 되어 문맹 타파 정책을 펼쳤다.
1960년에 경제기획원이 발표한 한글 문해율은 73%이다. 국민의 73%가 한글 문해자이니 이 즈음에 세종의 창제 목적이 실현되었고, 한글은 국민 문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백두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100durum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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