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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선열 추모글 80세 한평생 큰 빛 남기신 노산 이은상 선생님

  노산(鷺山) 이은상 선생은 1903년 10월 22일 마산에서 이승규 장로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아버지가 설립자인 마산창신학교(현재 대학승격) 고등과를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 문과로 진학(1923년) 수료 후 일본 와세다대학교 사학과에서 ...

  노산(鷺山) 이은상 선생은 1903년 10월 22일 마산에서 이승규 장로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아버지가 설립자인 마산창신학교(현재 대학승격) 고등과를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 문과로 진학(1923년) 수료 후 일본 와세다대학교 사학과에서 공부하고 그 영문과에서 함께 공부한 무애 양주동, 자칭 국보교수와 일화가 많다.

  양 교수가 대학 강의 중에 일본 노산 하숙방에서 영어 단어외우기 시합을 해서 첫 판은 경상도 천재 이은상 승리, 둘째 판은 황해도 천재 양주동 승리로 지금까지 2전 1승 1패로 무승부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고 하셨다. 노산이 마산의 노비산을 줄여 노산으로 아호를 지은 것을 보고 해오라기가 산에 있으니 바다가 그리울것이라는 양주동 교수의 말을 들은 노산은 「가고파」를지어 마산 고향바다를 그리워했다고 양 교수가 말씀하셨다. 

  1970년대 어느 날 밤 전규태, 이우종 시조 시인과 한남동 유엔빌리지 노산 자택을 방문했다. 40대의 박삼순 부인이 저녁 식사 대접을 잘해 주셨다. 그리고 시를창작하면 아내에게 먼저 읽어주고 발표하신다고 노산사랑을 말했다.

  나는 어느 여름 교사강습회에서 노산께서 병풍에 어재어학(於才於學) 백대일인(百代一人) 글을 써 주셔서 아내에게 백대에 하나 나오는 양 교수가 남편인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수강 국어교사가 우리들에게 동국대에서 하신 말씀을 들었다. 병풍에 그런 글을 써 주셨느냐고 말씀 드리니 노산 선생은 “무애가 풍이 좀 쎄지” 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노산 선생은 일제시대 애국가를 지은 안창호 선생의 모교 경신고교 교사를 하시고 이화여전 교수로 교단에 서셨다. 언론활동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에서 편집고문 및 출판 주간의 일을 하셨다. 항일 운동으로 국어의 횃불 주시경 선생 제자인 최현배, 김윤경, 장지영, 이병기, 변호사 이인 등과 함께 1942년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경찰서에 잡혀가 고문당하며 옥고를 치렀다.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1945년 1월 사상범으로 광양경찰서에서 옥고를 다시 치르다가 조국광복으로 풀려나셨다

  광복 후 대구청구대(현 영남대)교수, 숙명여대 이사장을 지내셨다. 함께 한글학회 재단이사인 애산 이인 선생이 한글학회 회관 건축기금으로 1970년대에 3천만 원을 내놓으셔서 한글학회회관건립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백낙준 명예회장, 이은상 회장, 김선기, 윤주영, 주영하, 태완선 부회장, 허웅 집행위원장으로 세우고 그밖에 곽상훈, 안호상 등 고문 32명, 고황경, 김옥길, 곽종원, 최철해 등 지도위원 74명, 공병우, 한갑수, 김계곤, 김석득, 박종국, 전택부 등 집행위원 32명, 위원 갈봉근, 황호동 등 1,128 명으로 천여 명이 넘는 한글학회회관건립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모금운동을 벌였다. 한글나무고등학생모임 한글나무동문회에서도 당시 큰돈 1만원씩 헌금했다. 모금은 1억 원 정도 되고, 1976년 10월 9일 530돌 한글날을 맞아 착공한 한글회관은 1977년 10월 8일 준공식을 가졌다. 전체 2억 2천만 원이 소요되었으나, 한글학회회관건립위원회 회장인 노산 선생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한글회관” 붓글씨를 받으시고 국고금 1억 원도 마련하여 노산 선생은 한글회관 건축에 깨끗이 책임을 다하셨다.

  한갑수 선생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1970년도부터 초·중·고 교과과서를 완전히 한글전용 교과서가 되도록 정부의 방침을 세우게 하셨다. 내가 노산선생 첫 시조 작품을 만난 것은 1949년 경남 함양군 마천초등학교 6학년 국어교과서에서였다. 「앉은뱅이」 (동그신 그 얼굴에 쪽빛옷 고운단장/따로가 외진 들에 누를 보라 피어신고/남이 다 나를 버린다고 나도 나를 버리리까) 단시조였다. 
  자기 주체성이 확실한 꽃이었다. 대학에 와서야 노산작품 「앉은뱅이」 시조임을 알았다. 함양중학교에 진학하니 3학년 때 예쁜 여자 음악 선생이 애국가와 「옛 동산에 올라」 노산 작사의 노래를 가르쳐 주셨다. 옛 동산은 마산의 노비산을 상징하고 일제가 우리 애국지사를 많이 희생시킨데 대한 항일 저항의식을 우의적으로 창작한 2수의 연시조였다. 내가 중·고·대학 교단에 서면서 교과서에 올라 있는 「가고파」,「고지가 바로 저긴데」, 「성불사의밤」, 「봄처녀」 등을 국어시간에 가르쳤다. 이 노산 시조 작품은 가곡으로 많이 불렀다. 노산 선생이 지은 휴전선의 기행문 「피어린육백리」도 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학생들의 애국심을 크게 길러 주었다.

  1970년대 민족문화협회를 만들고 남한산성에 한옥으로 민족도장을 지으셨다. 여기 외솔회가 들놀이 가서 노산 선생의 외솔정신 말씀을 들었다. 외솔 선생 셋째 아드님 최철회 사장이 주선한 외솔회 들놀이였다. 1974년도에 노산문학회를 만들고 시조 시인들의 창작 의욕을 격려하는 노산문학상을 만드셨다. 동국사범대 김성배 교수가 초대회장을 맡았다. 1990년 10월 26일 나는제15회 노산문학상을 받았다. 늘 자랑스럽다.

  노산 선생은 가람 이병기 시인과 현대시조 개척의 공로가 크며, 1920년대 시조부흥운동에도 참여하셨다. 첫 시집 『노산 시조집』(1932)에 양장시조 새 형식을 개척했으나 시도에 그쳤다. 노산 선생은 『조선사화집』(1931)을 비롯하여 『노방초』(1935), 『이충무공 일대기』(1940), 시조집 『푸른하늘의 뜻은』(1970), 『기원』(1982) 등 한 아름이 넘는 저서를 내셨다. 그간 대한민국훈장무궁화장(1970), 5·16민족상(1973), 금관문화훈장(추서 1982) 등을 받으셨다. 김동리 작가는 “노산 선생은 우리 시조단의 거목이요, 우리들에게 역사의 혼을 심어준 훌륭한 민족주의 시인”이라고 말씀하셨다. 노산 선생은 80평생 애국지사요, 사학자, 언론인, 한글운동가, 민족 시인으로 사셨다. 1979년 10·26 사태로 별세하신 박정희 대통령 조시도 쓰셨다. 서울현충원 박대통령 묘소 앞에 조시 시비가 서 있다.

  노산 선생은 1982년 9월 18일 자택에서 돌아가셨다. 전두환 대통령 뒤를 이어 나도 조문했다. 나라가 베푸는 사회장으로 국립묘지(현 서울현충원) 제1애국자 묘역에 안장되어 주무신다. 한때 젊은 아내 박삼순 여사가 노산 산소를 날마다 방문하고 잔디 뜯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노산 선생은 슬하에 1남 3녀를 두셨다. 세 딸은 미국에 살고 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평생을 나라 겨레 우리말과 글, 시와 시조를 위해 몸 바친 보배 같은 어른으로, 높이 존경되고 남긴 삶의 발자취가 우리의 거울이 되지 않을 수없다. 이 누리 떠나신지 40여년, 태어나신지 120년이 되는 한글학회 재단이사, 민족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님 하늘나라 편히 쉬시길 기도 드리며, 우리 모두 그리워합니다.





오동춘

오동춘

한글학회 명예이사, 짚신문학회 회장

sgod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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