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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 유감

  산과 들에서 저절로 자라는 풀을 통틀어 ‘푸새’라 하고, 이 중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성귀’라 이른다. 이 푸성귀 중에서 밭에서 사람이 기르는 풀인 농작물을 ‘남새’라고 이르고 ‘남새’를 기르는 밭을 ‘남새밭’이라 이른다.   이...

  산과 들에서 저절로 자라는 풀을 통틀어 ‘푸새’라 하고, 이 중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성귀’라 이른다. 이 푸성귀 중에서 밭에서 사람이 기르는 풀인 농작물을 ‘남새’라고 이르고 ‘남새’를 기르는 밭을 ‘남새밭’이라 이른다.

  이 푸성귀의 잎, 줄기, 뿌리를 ‘나물’이라고 부른다. 나물 중에는 특이하게 물에서 기르는 ‘콩나물, 녹두나물’ 같은 것도 있다. 그리고 이 나물은 재료인 나물을 조미하여 만든 반찬을 가리키기도 한다.

  나물은 중요한 먹거리라 나물과 결합된 우리말은 수없이 많이 있다. 계절을 나타내는 낱말과 결합된 봄나물, 여름나물, 가을나물, 겨울나물도 있고. 자라는 곳과 결합된 산나물, 들나물, 밭나물이 있고, 식물이름과 결합된 참나물, 당귀나물, 엉겅퀴나물, 비름나물, 무나물, 속세나물 등도 있고, 음식과 관련된 나물요리, 나물겉절이, 나물국, 나물무침, 나물반찬, 나물밥, 나물볶음, 나물부침, 나물전, 나물튀김, 나물장아찌 등도 있다.

  이 ‘나물’은 순 우리말이고 이 나물에 대응하는 한자말은 ‘채소(菜蔬)’이다. ‘채(菜)’도 ‘나물’이고, ‘소(蔬)’도 ‘나물’이라 ‘채(菜)’와 ‘소(蔬)’의 순서가 바뀐 ‘소채(蔬菜)’도 ‘나물’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소채’라는 말은 잘 쓰이지 않고 주로 채소라는 말을 사용한다. 채소도 그 종류가 수없이 많이 있다. 열매채소인 오이, 호박, 수박, 가지, 토마토와 잎줄기채소인 배추, 양배추, 시금치, 상추, 파와 뿌리채소인 무, 당근, 우엉, 감자, 고구마, 마 등이 있다.

  ‘채소’도 우리말 속에 들어와 쓰인 지 오래되어 ‘채’나 ‘채소’와 결합된 합성어도 많이 있다. 뿌리채소, 열매채소, 잎줄기채소, 봄채소, 여름채소, 가을채소, 채소반찬, 채소밥, 채소밭, 채소전, 채소원예, 채식(菜食), 채식주의, 산채(山菜), 산채정식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 한문을 주된 글말로 쓰던 시대에 번역문에 사용된 ‘채소’와 ‘소채’도 모두 ‘나물’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한문에서는 나물을 뜻하는 ‘菜’와 결합되어 쓰이는 말로는 ‘菜蔬[나물]’ 외에도 ‘山菜[산나물]’. ‘野菜[들나물]’. ‘園菜/園蔬[밭나물]’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山菜 : 遣使薦山菜于宗廟(사신을 보내어 산채(山菜)를 종묘(宗廟)에 천신(薦新)하였다.)[태조실록 13권[태조 7년 3월 15일] // 山菜、 山果外, 生魚物、生兔等種, 使之詳定中給價(산나물과 산과일 이외에 생어물과 생토끼 등의 물 종은 규정에 있는 값을 주게 할 것)[정조실록 31권, 정조 14년 10월 14일]

  野菜 : 園蔬野菜酒堪佐(밭나물 들나물도 술안주 됨직하네)[동국이상국집] // 女佩傾筐尋野菜(여인은 광우리 들고 들나물을 찾는데)[동문선 제8권] // 堆盤野菜雜江蘋(밥상 가득 들나물 중엔 강의 마름이 섞이었고)[목은집 제12권] // 野菜山蔬味自長(들나물과 산나물도 맛이 나름대로 좋네)[사가집 권29 시류] // 野菜摘前陂(들나물은 앞 언덕에서 뜯었도다)[월사집 제8권]

  園蔬/園菜 : 園蔬野菜酒堪佐(밭나물과 들나물도 술안주 됨 직하네.)[동국이상국집 권15 고율시(古律詩) // 野果與園蔬。皆由親種樹(들과실과 밭나물 모두 내 손으로 가꾼 것이네.)[동문선 권4 오언고시] // 滿意盤靑園菜嫩(마음에 드는 소반에 소반에 푸르런 것은 밭나물 부드러운 것이고,)[사가집 권5 시류]

  위의 예문들을 보면, 한문 문맥 속에 쓰인 ‘산채(山菜)’는 ‘산나물’이란 뜻으로 우리말 속에 들어와 우 리말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산채무침, 산채부침개, 산채비빔밥, 산채정식 같은 합성어가 만들어져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야채(野菜)’는 ‘들나물’, 원소(園蔬)/원채(園菜)는 ‘밭나물’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어학회에서 단기 4280년(서기 1947년)에 펴 낸 『조선말큰사전』(1947~1957)에 ‘야채(野菜)’가 표제 어로 올라 있는데, 그 뜻풀이는 ‘들에서 나는 나물’ 로 되어 있다. 따라서 위에 제시한 여러 예들과 사전 의 설명을 보면, 광복 전까지 ‘야채’라는 말은 ‘들나 물’이란 뜻으로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순 우리말 ‘나물’과 한자어 ‘채소’는 같은뜻을 지니면서도 사용하는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적절히 잘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에 지난날 ‘들나물’이란 뜻을 지닌 ‘야채’라는 낱말이 느닷없이 ‘채소’라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어 가고 있다. 그로 인해 종래에 사용되어 온 ‘나물’, ‘채소’와 공존하여 어휘질서에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예컨대 나물반찬, 채소반찬, 야채반찬 ; 나물가게, 채소가게, 야채가게 ; 나물전, 채소전, 야채전처럼 세 낱말들이 똑같은 뜻을지닌 채 공존한다면 어떻게 될까?

  도대체 지금 ‘채소’라는 뜻으로 쓰이는 이 ‘야채’는 어디서 나타난 말일까? 종래 우리 겨레가 써온 한문 글에서 ‘들나물’이란 뜻을 지닌 이 ‘야채’가 갑자기 ‘채소’란 새로운 뜻을 지니고 쓰일 리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우리말이 아닌, 다른 어떤 말에서 온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짐작컨대 이말은 일본말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말에 ‘野菜’가 ‘채소’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본말을 일본 사람들은 ‘やさい[yasai]’라고 발음하지만 글자는 주로 ‘野菜’로 쓰고 있다. 일본 사람들이‘やさい[yasai]로 발음하는 ‘野菜’를 우리 한자음으로‘야채’라고 받아들인 것도 해괴한 일이다.

  ‘채소’ 대신에 ‘야채’라는 말을 쓰게 되면, 지금까지 우리 겨레가 써 온 ‘나물, 채소’란 말, 그리고 이 말들의 파생어들과 뒤섞여 우리말 어휘 체계가 혼란스럽게 된다. 이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야채’라는 말을 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조규태

조규태

경상국립대 명예교수

jgt45@g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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