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근 선생을 추모하며 필자가 한글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외솔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을 읽고 나서였지만, 훈민정음 연구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연세대 국문과에서 지난해 세상을 뜨신 고 문효근 스...
문효근 선생을 추모하며
필자가 한글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외솔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을 읽고 나서였지만, 훈민정음 연구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연세대 국문과에서 지난해 세상을 뜨신 고 문효근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였다. (문효근 지음, ≪훈민정음 제자원리≫ 참조)
지금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강독 강의를 하는 대학이 거의 없지만,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에도 많지는 않았다. 운 좋게도 필자는 연세대에서 <한글갈>이라는 명저를 남긴 최현배 선생의 직계 제자로, 훈민정음학의 대가이신 문효근 선생으로부터 훈민정음에 대한 다양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참으로 행운이었고 가장 행복한 때였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 나오는 ‘ㅇ’와 ‘ㆀ’의 차이에 대한 세 시간 강의를 이어간 적도 있다. 이때는 강의계획서를 엄격하게 지켜 틀에 박힌 ‘진도’를 나가는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분위기나 학생들 반응에 따라 진도와 관계없이 한 문제에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일부 학생들은 지루해하기도 했지만, 필자에게는 훈민정음의 과학과 신비에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 <훈민정음> 제자원리> 문효근 지음, 경진출판.
해례본 합자해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괴여/괴ᅇᅧ’의 경우는 ㅇ 하나 차이로 사랑의 주체가 달라진다.
‘괴여’는 내가 남을 사랑한다는 뜻이지만, ‘괴ᅇᅧ’는 ‘남으로부터 내가 사랑을 받아’라는 뜻이다. ㅇ 하나가 주는 뜻의 차이와 묘미에 흠뻑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마치 ‘나’(왼쪽 짧은 획은 15세기에는 점)에서 점 하나를 안쪽으로 돌리면 ‘너’가 되는 것과 같은 문자의 묘미가 있었다. 현대말에서 ‘나’에 받침을 붙이면 ‘남’이 되는 것과 같다. 훈민정음은 문자과학이기도 하지만, 그 과학을 자꾸 파고들면 신비와 재미를 함께 주는 묘미가 있었다.
문효근 선생님과 이런 인연으로 훈민정음 학자로서의 꿈을 키우게 되었고, 학사 논문을 문효근 선생 지도로 “입말투 글말[언문일치체]의 전통과 뜻-한글문화의 해적이스런 뜻(역사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때 문효근 스승님의 격려가 오랜 세월 고난을 이기는 힘이 되었다.
세종대왕이 창제하고 반포한 훈민정음은 입말투 글말이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가장 큰 가치가 있다. 이러한 입말투 글말은 말하듯이 쉽게 쓸 수 있는 언문일치 문장을 말한다. 인류의 근대는 바로 언문일치 문장을 누구나 쓸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을 말한다.
사람다운 세상을 위한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은 누구나 글자를 배우고 책을 읽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듯이 쉽게 글을 쓰는 언문일치, 구어체야말로 사람다운 세상을 여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가) 人生是空手來空手去
나) 人生은 空手來空手去다.
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다.
라) 人生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마) 인생(삶)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바로 ‘마’와 같이 쉽게 누구나 쓰고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 언문일치체 문장이다. 이런 구어체 문장은 서양에서도 15세기 르네상스 이후에나 가능했다. 그전에는 상류층만이 라틴어로 글을 쓰고 책을 펴냈다. 그래서 독일은 독일말로, 이탈리아는 이탈리아말로, 프랑스는 프랑스말로 적으면서 언문일치 시대가 열렸다. 우리가 중국식 문장인 한문에서 벗어나는 역사적 맥락과 같다.
우리나라는 놀랍게도 15세기에 완벽한 언문일치가 가능한 문자가 태어나고 보급된 것이다. 물론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신분제 한계와 양반 지식인들이 한글을 이류 문자 취급하는 바람에 잘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언문일치체에 가장 이상적인 문자가 15세기에 나온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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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세종신문>에 필자가 연재했던 것입니다.
김슬옹
한글닷컴(Haangle.com) 연구소장/편집위원, 세종국어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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