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15년이 되던 1433년 설날은 나에게 특별한 해였다. 나의 시대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강도 크게 자리 잡아 가던 해였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만백성의 평안과 나라의 평강을 위해 새해맞이 음악회를 크...
내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15년이 되던 1433년 설날은 나에게 특별한 해였다. 나의 시대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강도 크게 자리 잡아 가던 해였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만백성의 평안과 나라의 평강을 위해 새해맞이 음악회를 크게 열었다. 해마다 있는 행사이지만 이 해는 더욱 의미가 깊었다. 1425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한 조선의 표준음 정하기와 그에 따른 음악 정비, 악기 제정 등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새해맞이 아악(정아한 음악이라는 뜻으로 의식용 음악) 연주회(회례연)가 신하들과 궁인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열렸다. 모두가 들떠 있었지만 나는 바른 소리가 어떻게 나는지 어떤 악기가 어떤 음을 내는지 귀를 쫑긋하느라 들떠 있는 백성들의 눈빛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특히 표준 악기였던 편경 연주는 나의 온몸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편경의 음이 흔들리면 모든 소리가 흔들리고 모든 악기가 갈 길을 잃을 것이다.
▲ 세종대왕 지음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
연주가 시작되자 모든 것이 평화롭게 보였다.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편경의 두 번째 줄 첫째 매 소리가 내 귀를 어지럽혔고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원래 음보다 음이 약간 높게 들렸다.
깜짝 놀랐다. 완벽한 바른 소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어긋나는 소리라니…. 일단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입을 열었다.
“둘째 줄 첫째 돌[이칙 1매(夷則 1枚) 소리가 약간 높으니 어찌 된 일이오”-세종 15/1433/1/1
이때 이 모든 과정의 연구 책임자이자 연주 책임자였던 박연이 화들짝 놀라 편경 앞으로 급히 달려가 편경을 살폈다.
“전하. 황공하옵니다. 맑은 돌(경쇠)을 매단 줄을 가늠하는 먹물이 남아 있는 돌을 다 갈지 아니한 까닭이옵니다”
돌에 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던 것이다. 박연이 먹물을 말리니 음이 제대로 나왔다.
이 사건으로 후손들이 나를 절대 음감이라 부른다고 하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바르고 조화로운 소리에 집중했을 뿐이다. 내 음악을 연구하는 송혜진 후손이 내가 반음의 10분의 1정도 차이를 알아챈 것이라 하니 절대음감은 맞는 듯하다.
내 절대음감을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다. 음악 연주와 이론에 밝았던 천재 음악가 박연의 도움으로 조선의 음악은 이제 완전한 기틀을 잡아 천세만세 소리가 이어지는 시대가 열렸음을 자랑하고자 함이다.
내가 음악을 바로잡기 전에는 악기를 중국에서 수입해서 썼다. 특히 고려시대 때 중국 송나라에서 보내 준 편종을 사용했는데 아주 먼 데서 옮겨 와서 음이 제대로 맞지를 않았다. 15세기에 표준음을 정하고 표준 악기를 만드는 것은 중국 황제의 특권이었으나 나는 우리식 표준음과 표준 악기를 통해 아악(공식 행사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정비하고 우리식 음악인 신악을 몸소 만들어 백성의 귀가 편안하고 마음이 편안한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내가 정비한 신악은 중국에서 온 우리의 제례 음악인 아악과 전통 음악인 향악, 중국 음악인 당악 등을 융합한 음악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이 좋았다. 거문고와 비파를 잘해 놀기 좋아하는 양녕 형님을 내가 가르쳤을 정도이다. 나는 임금 자리에 오른 뒤로는 직접 창안한 정간보로 음악을 정비해 나갔다. 이렇게 바로잡은 음악을 바탕으로 나는 백성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사는 태평성대를 여는 정치를 하고 싶었다.
내가 우리 음악을 새로 정비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30세 무렵인 1425년이었다. 제례 음악에서 중국 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악은 본시 우리나라 음악이 아니고 중국 음악이오. 중국 사람이라면 평일에 들어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고, 죽어서는 아악을 듣게 되니 어찌 된 일이오?”
“우리나라의 음악이 반드시 중국에 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중국의 음악이라고 또한 어찌 바른 것을 얻었다고 하겠는가?”
이런 의문을 품고 우리식 음악을 바로 세우려 할 때 박연이 나타나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그런 음악을 바탕으로 소리 연구를 정밀히 한 덕에 음표와 같은 문자 훈민정음을 제정할 수 있었다.
내게는 소리가 하늘이요 백성이었다. 그 소리를 음악으로 적게 만든 것이 정간보였고, 문자로 적게 만든 것이 훈민정음이었다. 성스러운 우리 왕조에 이르러 진정한 음악이 완성되었으니 그러한 자부심은 음표와 같은 훈민정음 반포로 이어졌다.
▲ 왼쪽) 세종실록 오례의에 실려 있는 12개 편경. (오른쪽) 현대 16개 편경.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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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저작자(박재택,김슬옹) 동의로 공유합니다.
훈민정음은 백성들과 함께 /세종
한글 집현전(Editor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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