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솔 정인섭 선생이 가신지 벌서 40주년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눈솔 선생을 처음 뵌 것은 내가 서울대 문리대 언어학과 학부 2학년 때인 1956년 문리대에 출강하셨을 때였고 그 후 1961년 대학원에서 언어분석이란 강의를 하실 때에 역시 청...
눈솔 정인섭 선생이 가신지 벌서 40주년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눈솔 선생을 처음 뵌 것은 내가 서울대 문리대 언어학과 학부 2학년 때인 1956년 문리대에 출강하셨을 때였고 그 후 1961년 대학원에서 언어분석이란 강의를 하실 때에 역시 청강을 몇 주간 한 바 있다.
그러나 성함은 그 이전부터 <산들바람>이란 우리 가곡의 작사를 하신 분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글학회의 여러 행사 때마다 가까이서 뵐 수가 있었다.
그 후에 나는 정인섭 선생이 일본에서 카이모그라프(Kymograph)와 팰러토그라프(Palatograph)를 이용한 우리말 실험음성학적 연구를 하셨고,
이 같은 연구 결과를 모아서 『실험음성학 연구』라는 책을 펴내신 실험음성학의 선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직계 스승인 무돌 김선기 선생은 런던대학에서 1938년에 다니엘 존스(Daniel Jones) 교수의 도로 카이모그라프(Kymograph)와 팰러토그라프(Palatograph) 실험을 포함하는 「A Study of Korean Phonetics」라는 논문을
완성하여 런던대학 석사 학위를획득한 바 있다.
정인섭 선생을 거론하며 조선음성학회를 빼놓을수가 없다.
사실 이 땅에는 조선음성학회라는 이름의 음성학회가 있었다. 존재는 했으나 일제 통치하에서 숨도 못 쉬고 사는 그 어려운 시기에 회지 발간도,
학술 모임도 하지 못하고 동면하는 상태에 있었으니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1935년 여름에 영국 런던에서 제2회 세계언어학자 대회가 열렸는데 한국에서 이 사실을 알고, 학자를 파견해 한국어에 관한 연구를 발표시키려고 계획하였다.
개인보다는 학회의 대표로 참가하여 발표하는 것이 더 보기도 좋고 무게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음성학회가 급하게 탄생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정인섭 선생과 김선기 선생뿐만 아니라 문화와 문학계의 사회 저명인사들이 다수 참여하여 단기간에 조선음성학회를 결성한 것이다.
고려대의 김성수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우리말과 글과 얼을 지키려면 서구의 언어학을 배워 와서 사전 등을 만들면서 우리말의 학문적인 체계를 정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조선어학회에 몸담고 있던 젊은 김선기 선생이 발탁되어 파리와 런던까지 유학을 갔던 것이다.
세계언어학자 대회 개최 당시 김선기 선생이 마침 영국에 체류하고 계셨기에 김 선생이 한국 대표이자 조선음성학회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어 자음에 대해 발표하셨다고 한다. 당시의 발표 원고를 나는 아직도 어딘가에 보관하고 있다.
“정인섭 선생의 로마자 표기법 핵심은, /ㄱ/ 초성 /gh/(ghim), 중성 /g/(ghogi), 종성 /k/(hok)에서와 같이 초성에서 /h/를 더하는 방식이다. 물론 /ㅂ, ㄷ, ㅈ/도 /b, d, j/ 다음에 /h/를 더한다. 그리고 된소리 /ㄲ, ㄸ, ㅃ, ㅉ/ 의 초성은 /kg, td, pb, tj/ 와 같이 적는다
조선음성학회는 주로 정인섭 선생이 이끄셨다.
1945년 해방 후에도 계속 회장직을 맡아 오셨다.
그러나 8월 15일 이전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학회 활동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어서 아쉽다.
김선기 선생은 문리대 언어학과에서 나를 직접 가르치셨고, 정인섭 선생도 문리대에 출강하셔서 나를 가르친 스승의 한 분이니 대한음성학회와 학풍이 같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학풍이 같은 스승의 학회이므로 조선음성학회를 대한음성학회의 전신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고 후학들에게 이야기해 왔다.
해방 후 1948년에 조선음성학회의 명칭이 한국음성학회로 바뀌었다.
그래서 내가 1976년에 창립한 학회는 <대한음성학회>라고 명명하였다.
2009년 대한음성학회와 한국음성과학회가 통합되어 한국음성학회가 새로이 출범하게 되었다.
통합된 학회 명칭이 정인섭 선생이 이끄시던 “대한음성학회”라는 명칭과 동일하게 되었으니 이제 한국 음성학회의 기본정신과 학맥은 면면히 일사 분란하게 이어 나갈 것으로 믿는다.
정인섭 선생이 작고하시기 한 달 전 즈음 나는 전화로 인사를 드리며 대한음성학회의 회지 『말소리』 제6호(1983. 6.)에 옥고를 한편 써 주십사 하여 청탁을 드렸다.
선생님은 쾌히 응낙하셨고 불과 며칠 사이에 당시 논란이 많았던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에 관한 당신의 새로운 제안이 담긴 원고,
“가장 실용적인 로마자 안 ―빨리 통일하라―” 라는 제목의 원고를 보내주셨다.
정인섭 선생의 로마자 표기법 핵심은, /ㄱ/ 초성 /gh/(ghim), 중성 /g/(ghogi), 종성 /k/(hok)에서와 같이 초성에서 /h/를 더하는 방식이다.
물론 /ㅂ, ㄷ, ㅈ/도 /b, d, j/ 다음에 /h/를 더한다.
이것은 끝없는 논쟁을 피하고 하나의 획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된소리 /ㄲ, ㄸ, ㅃ, ㅉ/ 의 초성은 /kg, td, pb, tj/ 와 같이 적는다. 그리고 원고와 함께 영문으로 출판하신 한국의 전래 동화책을 동봉해 보내 주셨다. 그런데 말소리가 나올 즈음에 선생이 별세하셨다는 놀라운 소식이 들려 왔다.
나는 며칠 후 눈솔 선생의 글이 담긴 말소리 20여권을 싸들고 댁으로 찾아가 영정 옆에 책을 올려놓고 문상을 하였다.
전화 통화한 지가 불과 얼마 안 되는데 갑자기 떠나시다니 참으로 서글픈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더 자주 찾아 뵙고 더 가까이 모시지 못한 것이 커다란 한으로 남는다.
다행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일이 있다면, 수년 전 정인섭 작사, 현제명 작곡의 <산들바람>이란 노래를 눈솔 선생의 한글 가사와 나의 영문 번역 가사로 내가 직접 불렀고,
이 곡이 유튜브에 올라 있으므로 누구나 유튜브 창에 <산들바람 이현복>을 치면 이 곡을 들을 수있음을 밝혀 둔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생전 눈솔 선생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름을 느끼곤 한다.
이현복
서울대 명예교수, 한글학회 명예이사
hvnsl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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