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기의 조선어 연구라고 하면 대체로 조선어학회 사건을 연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던 분들이 함흥 형무소로 잡혀가 모진 취조와 재판을 받다가 두 분이 옥사하기까지 한 이 끔찍한 사건은 식민지 시기...
식민지 시기의 조선어 연구라고 하면 대체로 조선어학회 사건을 연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던 분들이 함흥 형무소로 잡혀가 모진 취조와 재판을 받다가 두 분이 옥사하기까지 한
이 끔찍한 사건은 식민지 시기조선어 연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 내내 조선어를 연구하는 일이 이렇게 엄혹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어 연구사에서 가장 앞줄에 놓일 만한 뜻깊은 저술인 『우리말본』과 『조선문자급어학사』가 바로 이 시기에 출간되었음을 상기한다면,
식민지 시기는 오히려 조선어 연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열정에 차 있을 때이고 또 그만큼 왕성한 연구가 진행된 때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조선어 연구의 중심에 서 있던 단체는 조선어학회였는데,
잘 알려져 있듯이 조선어학회는 1908년 국어연구학회로 창립하여 1921년에 확대 조직된 조선어연구회를 계승한 것이다.
최두선, 권덕규, 장지영, 임경재 등에 의해 확대·강화된 조선어연구회는 1926년 11월 ‘가갸날’을 제정하여 기념하고
다음 해 동인지 『한글』을 발간하면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게 된다(이때의 동인은 권덕규, 신명균, 이병기, 최현배, 정렬모). 그런데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와 『한글』 외에도 식민지 시기 조선어 연구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대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수양동우회의 기관지 『동광』이다.
흥사단의 국내 지부라고 할 수 있는 수양동우회가 펴내던 잡지 『동광』은 물론 종합잡지로서 한글이나 조선어 연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매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창간 초기부터 『동광』의 편집진은 한글의 표기법이 문법적이어야 한다며 주시경의 표기법에 토대를 둔 편집 방침을 밝히고 있었으며,
한글 표기법에 관한 것은 물론이고 조선어에 대한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지속적으로 실었다.
또 연구자들 간의 토론과 논쟁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기도 했다. 애초 일본 릿교대학의 졸업 논문이었던 김윤경 선생의 『조선문자급어학사』는 이 『동광』에 장기 연재되며 그 내용을 더욱 충실히 할 수 있었고,
또 안확과 주시경 제자들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던 곳도 바로 이 『동광』의 지면이었다.
『동광』이 이와 같이 한글 표기법 및 조선어 연구와 관련된 담론의 한 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수양동우회의 주요 간부였던 이윤재, 김윤경 선생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어 연구자들 사이의 토론을 유도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한글 표기법의 바람직한 방향을 찾아가려고 했던 『동광』의 시도가
어떤 효과를 발휘했는가 하는 점은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표기법 설문 조사에서 잘 드러난다.
두 차례의 표기법 관련 설문 조사 가운데 첫 번째는 1927년 1월의 ‘우리글 표기례의 몇몇’이라는 기사인데,
여기서 『동광』의 편집진은 당시의 조선어 교사 및 교수 등 전문가 18명에게
10가지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묻고 그에 대한 답변을 가감 없이 전달함으로써 각각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들의 판단을 돕고 있다.
이 10가지 문제 가운데 전반부에 해당하는 것은 대체로 당시 총독부에서 제정한 이른바 ‘언문 철자법’의 문제점에 대한 것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아래아나 구개음화와 관련된 표기에서 역사적 관습에 입각한 표기(예컨대 ‘ 일, 텬디’)를 할 것이냐 아니면 현실 발음을 반영한 표음적 표기(예컨대 ‘매일, 천지’)를 할 것이냐에 관한 것이었다.
1912년, 1921년의 ‘언문철자법’은 모두 고유어에서는 표음적 표기를, 한자어에서는 역사적 표기를 채택하는 문제점이 있었는데,
이 설문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의 어윤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표음적 표기로 통일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린 것은 후반부였는데, 대체로 어근을 어디까지 반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었다.
특히 8번 문항인 ‘더우니, 지으니’인가, ‘덥으니, 짓으니’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극명히 갈렸다.
같은 주시경 제자들 사이에서도 권덕규, 신명균 선생은 ‘더우니’ 쪽이었고, 김윤경 선생은 ‘덥으니’ 쪽이었으며, 최현배와 이병기 선생은 답변을 보류했다.
어근을 밝혀 적어야 한다는 주시경의 표기법을 곧이곧대로 따른다면 ‘덥으니’가 되겠지만,
이는 현실 발음과는 너무나도 멀어지는 표기였기 때문에 대중에게 강요하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지금은 ‘더우니, 지으니’를 불규칙 활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주시경의 문법에는 활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불규칙 활용이라는 관점 역시 가능하지가 않았다.
따라서 1927년의 시점에서는 ‘더우니, 지으니’를 문법적으로 설명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1933년의 「한글마춤법통일안」은 바로 그러한 문제를 극복한 것이고 이는 최현배 선생의 이른바 ‘준종합주의’라는 새로운 단계의 문법을 바탕으로 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국어 연구사의 가장 높은 봉우리라 할 『우리말본』은 바로 이와 같은 식민지 시기의 줄기찬 조선어 연구의 결과였던 셈이다.
주시경 선생은 물론이고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인사들의 조선어·한국어 연구는 분명 당대의 시대적 과제를 회피하지 않고 그 시대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결과였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어 연구자들은 과연 이 시대의 과제와 진지하게 대면하고 있는 것일까? 이 시대의 과제는 주시경, 최현배 선생이 대결한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고 믿는다.
그분들이 대면한 과제가 피억압 민족의 언어 문제였다면, 지금의 과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지역적, 계층적, 문화적, 인종적 소수자들의 불평등한 언어 문제인 것은 아닐까?
조선어학회 어른들의 정신을 잇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오늘 새삼스레 생각해 본다.
김병문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 HK교수
pourm@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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