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럽에서의 한국어 강좌 수요가 폭발적이라고 한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한국어 강좌 수요는 최근 2~3년 사이 3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프랑스는 1994년부터 ‘자국어 전용법’을 시행할 만큼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자국 언어와 문화에 ...
최근 유럽에서의 한국어 강좌 수요가 폭발적이라고 한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한국어 강좌 수요는 최근 2~3년 사이 3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프랑스는 1994년부터 ‘자국어 전용법’을 시행할 만큼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자국 언어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높은 국가이다.
그런 프랑스가 최근 한국어로 들썩거릴 정도라 하니 자긍심이 드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일련의 소식들을 접할 때면 나는 마음 속에 은근한 이름 하나를 떠올려 본다.
100년 전, 프랑스 파리대학의 음성학 실험실에서 한글의 자·모음을 낱낱이 발음해 가며 그 발음 기관의 변화를 손그림으로 옮겨 갔던 이. 그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음성학 바탕을 마련한 이. 그가 바로 이극로였다. 지금 한국어에 열광하는 프랑스인들이 100년 전, 그들의 나라 안에서 이미 한글의 과학적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감회는 어떠할까?
내게 ‘이극로’는, 지역의 몇몇 연구자들과 함께 꾸려갔던 ‘경남지역문학연구회’에서 처음 받아든 연구 과제였다. 그때 내가 받아든 그에 대한 정보는 한겨레신문사에서 펴낸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1996)에 실린 6쪽짜리 글이 전부였다. 참으로 막막한 과제였다. 그러다 이종용이 쓴 「이극로 연구」(부산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3)를 찾아 읽게 되었다.
이극로의 출생에서부터 성장기, 그리고 그의 일생 전반에 대한 기록이 평전 형식으로 정리된 글이었다. 그 논문은 막막함 속에 받아든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 빛줄기를 따라 처음 찾아간 이극로의 의령 고향집은 기울어진 기둥에 오랜 슬레이트 지붕이 나직하게 엎드린, 해묵은 흑백사진 같은 풍경이었다. 그 고향집에서 만나 뵈었던 종중의 먼 친척이라는 어느 분은, 이극로의 북한 편력 때문에 말씀을 매우 조심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따라 다니는 과정에서 나는 ‘이극로’라는 이름이 ‘월북인사’로 낙인찍혀 그렇게 허룩하게 지워지고 말 이름이어선 안 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 이름은 남북의 이념을 넘어 민족의 역사로 새로이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고. 통일 한국으로 가는 디딤돌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만 해도 남북의 언어학자들이 통일 사전을 위한 공동 작업에 힘을 쏟을 때였기 때문에, 우리말에 대한 그의 애정이 남북의 통일어 연구에 한 징검돌이 될 수 있겠다고 믿었던 까닭이다.
그로부터 10여 년 간, 나는 게으르게 이극로의 이름을 따라 다녔고, 사는 일을 핑계로 그 이름을 잊고 지내다 보면 그 이름이 불쑥 내 생을 따라와 나를 건드려 주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극로의 장 조카였던 이종무 선생을 뵈어온 것은 큰 기쁨이었다. 선생이 그때껏 고이 간직하고 있던 이극로 관련 사진들과 편지들, 그리고 이극로의 저서 『고투40년』(필사본)을 그렇게 얻었다.
그 자료들과 이종무 선생의 증언들을 바탕으로 쓴 글이 「고루 이극로 박사의 삶」(지역문학연구 제2호, 1998)이었다. 그 연구를 기점으로 이극로 현양 사업을 위해 지역 및 기관의 여러 관계자들과 다양한 논의를 하기도 했지만, 하나같이 이극로 이름 끝에 붙은 ‘월북’이라는 단어에 조심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더구나 이극로가 북한에서 요직을 거친 인사였던 탓에 순수 학문 연구의 테두리 밖에서는 현실적 제약이 더 선명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 이종무 선생이 건네주신 귀한 자료들과 말씀들을 다 옮기지 못한 채 나는 사는 일을 핑계로 다시 그 이름에서 멀어졌다.
학교를 떠나 생활 전선에서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던 어느 해 봄, 낯선 메일 하나를 받았다. 지금 그 세세한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그 메일 속에 담긴 열정을 읽으며 화끈. 낯이 붉어졌던 기억은 선명하다. 그렇게 이극로라는 이름을 매개로 만난 이가 조준희 선생이다. 마알간 얼굴빛으로 이극로라는 이름을 열정적으로 따라다니던 그이를 볼 때마다 학자로서의 그의 태도에 존경심이 일었고, 나의 게으름으로 흐릿해진 ‘이극로’라는 이름이 그의 열정 앞에서 반짝일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지난 20년 동안, 조준희 선생과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한 것은 세 번 정도이니 나머진 대게 메일과 전화로 주고받은 안부일 것이다. 그때마다 그는 늘 이극로라는 이름으로 된 알찬 결실들을 안부로 전했다. 그중 가장 최근의 일이 이극로가 독일의 훔볼트 대학에 개설했던 ‘한국어 강좌’의 실체를 전한 일이다(2019. 10. 10. 국가기록원 공개). 조준희 선생이 이극로의 이름을 따라 직접 유럽의 여기저기를 부지런히 찾아다닌 결과였다. 아울러 그가 펴낸 그 방대한 『이극로 전집』(소명출판, 2019) 앞에서 나는 한없는 기쁨으로 몇 날을 설레었다. 20여 년 전, 이극로에 대한 자료들이 이 손 저 손으로 낱낱이 흩어질 것만 같던 안타까움이 일시에 해소되는 기꺼움이었다.
몇 번의 이사를 다니는 동안, ‘이극로’라는 이름은 여전히 내 생을 따라와 책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여러 이들이 쓴 몇 권의 연구서들과 낱낱의 관련 글들이 실린 책들, 그 옆 낡은 상자 안에는 빛바랜 사진들과 이극로의 필체로 쓰인 편지복사본, 그리고 이제는 재생조차 힘든 이종무 선생과의 녹음테이프들, 그리고 그 곁에 조준희의 『이극로 전집』이 꽂혀 있다.
그 책장을 쓸어보며 남은 바람 하나를 되새겨본다. 오래 묵은 그의 고향 땅 옛집에 그의 이름이 번듯하게 내걸릴 수 있기를. 온 생을 다해 치열하게 살아 냈던 그의 눈부신 ‘고투40년’이,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827번지’에 이르러 ‘이극로’라는 이름 석 자로 온전히 반짝일 수 있기를!
차민기
문학박사(국문학 전공)
uphill23@naver.com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