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과 여주시는 더 이상 나와 장영실을 욕보이지 마라 내가 잠들어 있는 여주 영릉에는 내가 살던 시기를 가장 빛나게 만들었던 각종 과학 기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여주를 찾아 나와 우리 시대를 빛나게 했던 과학자들을 ...
문화재청과 여주시는 더 이상 나와 장영실을 욕보이지 마라
내가 잠들어 있는 여주 영릉에는 내가 살던 시기를 가장 빛나게 만들었던 각종 과학 기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여주를 찾아 나와 우리 시대를 빛나게 했던 과학자들을 함께 칭송하고 있으니 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와 장영실의 뜻을 거스르고 내리깎는 전시물이 있으니 내 어찌 지하에서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로 앙부일구다. 나와 장영실이 만든 앙부일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기획하고 장영실이 만들었으니 ‘우리’라고 하겠노라. 영릉의 앙부일구는 우리가 가장 강조하려는 것을 일부러 무너뜨리려는 듯한 전시물로 만들었다.
우리는 어린이들도 시계를 볼 수 있도록 받침돌 일구대를 1미터도 안 된 3단 계단 위에 설치했는데 지금 저 앙부일구는 어린이들은커녕 어른들조차 제대로 볼 수 없게 전시했으니 어찌 내 가슴이 답답하지 않겠는가? 보지 못하고 볼 수 없는 시계가 되었도다.
이 시계를 설치한 1434년은 내가 훈민정음을 발명하기 9년 전이었으니 어린이와 한자 모르는 백성들도 알 수 있도록 시각 표시를 동물로 표시했는데 저 흉물은 중국인들조차 한자로 시각 표시를 해 놓았으나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 세종시대 앙부일구 복원 촉구용 포스터 © 김슬옹
▲ 세종대왕릉 앞마당에 설치한 잘못된 앙부일구와 일구대. © 2021년 하지 기념 비대면 학술대회 자료집 ≪오목해시계, 앙부일구의 빛과 그림자≫ 사진(육선희) 도록 51쪽.
▲ 세종시대 앙부일부 받침돌(일구대) 모양과 같은 것으로 보이는 종묘 일구대. © 육선희
사실 장영실은 내가 발탁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태종이 찾아낸 인재였다. 사람들은 태종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잔인할 정도로 외척까지 축출해 가며 나의 시대를 준비해 주었노라고 말들을 한다. 내가 아들로서 아바마마의 흉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부정하지도 않겠노라. 다만 장영실 발탁에서 보듯 인재 기르기 측면에서도 나의 시대를 준비해 주신 것을 가볍게 여기지는 말라는 것이다. 못 고치는 것이 없고, 못 만드는 것이 없다는 장영실이 아니었던들 어찌 하늘의 뜻을 백성들을 위한 과학 기술로 꽃피우고자 했던 나의 꿈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앙부일구를 완성하기 1년 전인 1433년 나는 그를 상의원 별좌(종5품)에 임명했다. 상의원은 옷을 만들고 궁중재물과 보물을 맡아보는 곳이다. 한낱 관노로 천대만 받아 오던 장영실은 노예의 굴레를 벗고 종 5품의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이 큰 힘이 되어 장영실은 마침내 중요한 과학 기구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다. 임명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장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내 곁에 가까이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자격루 같은 빼어난 물시계도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김슬옹 후손이 이 문제로 유튜브 동영상까지 찍었다고 하니 그의 목소리는 내 목소리임을 명심하고 문화재청과 여주시는 서둘러 나의 뜻을 받들어 장영실과 여주시를 더욱 빛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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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백성들과 함께 /세종
한글 집현전(Editor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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