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우리 인류에게 언어라는 아름다운 보배가 없었던들 오늘날 우리 인류가 가장 자랑하는 모든 문화는 움도 싹도 터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언어가 없는 곳에 국가가 어디 있으며, 언어가 없는 곳에 역사가 어디 있으며, 언어가 없는 곳에 교육이 어디...
“만일 우리 인류에게 언어라는 아름다운 보배가 없었던들 오늘날 우리 인류가 가장 자랑하는 모든 문화는 움도 싹도 터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언어가 없는 곳에 국가가 어디 있으며, 언어가 없는 곳에 역사가 어디 있으며, 언어가 없는 곳에 교육이 어디 있으랴? 우리의 국가, 역사, 교육은 오직 우리의 언어를 통하여 처음으로 그 존재를 나타내고, 그 가치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 정태진, 「재건도상의 우리 국어」(1946년)에서.
석인 정태진 선생(1903~1952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우리말 말살 정책에 항거하여 우리말을 교육하면서 지켰으며, 광복 이후에도 우리말 교육과 연구에 큰 업적을 이루었다.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조선어학회에서 큰사전 편찬에 온 힘을 기울였는데, 1942년 조선어학회 수난 사건으로 모진 옥고를 치르고 나서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광복 한 달 전인 1945년 7월 1일 풀려나왔다. 선생은 광복과 더불어 한글학회에 돌아와 큰사전 편찬을 다시 시작하는 한편, 여러 교육기관에서 국어학을 강의하였다. 선생의 의지와 헌신에 힘입어 조선어학회는 마침내 1947년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 첫째 권을 세상에 내어놓았다. 우리 민족 문화사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금자탑을 세웠다.
정태진 선생은 1921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를, 1925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는 미국인 선교사인 연희전문학교 부교장의 미국 유학 권유를 사양하고, 추운 지역이라 교사 구하기가 어려웠던 함흥에 있는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 교사로 근무하였다.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면서 틈나는 대로 민족의 얼을 심어 주며, 한글의 우수성과 조선 문학의 뛰어남을 통하여 조선말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선생은 여러 가지로 부족한 자신이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라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지내던 차에 다시 유학 권유를 받고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그렇게 하여 1927년 미국 우스터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1930년에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가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였다. 1931년에 귀국하자 서울에 있는 여러 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오라고 했지만 다 거절하고 영생여학교로 복귀하였다. 그렇게 하여 10년을 함흥에서 지냈는데 어느 날 여섯 살 위인 연희전문학교 동기생인 정인승 선생으로부터 조선어학회에 와서 함께 일하자는 간청을 받았다. 선생은 정인승 선생 뜻에 동의하여 결국 1940년 봄방학에 영생여학교를 사직하고 조선어학회로 와서 큰사전 편찬 사업에 힘을 합쳐 일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42년 조선어학회 수난 사건의 첫 인물로 걸려들어 모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광복 다음 날인 8월 16일, 혼자 조선어학회에 나가 편찬실을 둘러보았으나 큰사전 원고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부터 새롭게 큰사전 원고를 쓰려고 하니 고문당할 때보다 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남은 인생을 다시 큰사전 원고 쓰는 일에 바치기로 결심한다. 8월 20일 조선어학회는 긴급 총회를 열었다. 가장 시급한 것이 국어 교육이라 판단하고 국어 교과서를 편찬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큰사전 원고 쓰는 일과 함께 새 교과서 엮기에 온 힘을 다하였다.
정태진 선생은 말에는 겨레의 얼이 들어 있으니, 겨레의 말을 사랑하는 마음은 곧 겨레의 얼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하였다. 이렇듯 선생이 평생 지녔던 정신은 한글 사랑의 정신과 겨레 사랑의 정신이었으며, 우리 겨레의 행복을 위하여 한글을 사랑하였다. 말과 글은 한민족의 피요, 생명이요, 혼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선생은 국어와 한글은 민족, 문화, 역사의 원동력이라는 믿음을 영생여학교에서 교육하면서, 조선어학회에서 『큰사전』을 편찬하면서, 언제나 변함없이 지니고 있었다. 영생여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안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너희들은 조선말만 써야 한다. 너희들이 아름다운 조선말을 안 쓰면, 얼마 아니 가서 조선말과 조선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게 된다.”라고 교훈하였다.
선생의 연구 업적은 저서와 강의안, 논문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강의안은 직접 손으로 쓴 글인데, 더하고 지우고 여러 차례 고쳤다. 그러나 이 강의안이 더 보태고 고쳐서 온전한 저서로 출간하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시니 아쉬움이 크다.
선생의 연구 내용은 국어학 전반에 걸쳐 있다. 말소리와 말본은 물론, 방언과 옛말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이는 큰사전 편찬의 올림말, 뜻풀이와 관련을 맺는다. 선생의 방언과 옛말 연구 방법은 철저하게 비교 연구로 일관하였는데, 언어과학은 언어의 구체적, 경험적 사실을 연구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라 하였다. 당시 학문 경향인 비교언어학의 영향으로, 국어를 과학적 연구인 내적 비교를 위하여 시골말 캐기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방언의 가치와 방언 조사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서둘러 방언을 수집할 것을 주장한 것은 언어 변화와 방언 연구를 위한 선구자적인 업적이라 하겠다.
이제 우리는 선생의 고귀한 우리 말글 사랑 정신과 선생의 학문 업적을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 말글을 가꾸고 지키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선생의 삶과 학문을 길이길이 이어가는 길이라 믿는다.
권재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kwonjil@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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