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문화재단에서 한글창제 580주년을 맞아 훈민정음 특별판을 기획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진행하는 이번 특별판에는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해례본 영문 번역이 포함된 해설서'가 함께 제작된다고 한다. 그런데 훈민정음...
간송미술문화재단에서 한글창제 580주년을 맞아 훈민정음 특별판을 기획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진행하는 이번 특별판에는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해례본 영문 번역이 포함된 해설서'가 함께 제작된다고 한다.
그런데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에 대해 익히 들어보기는 했으나 한자말인데다 자주 사용되지 않는 말이다 보니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문자이름 ‘훈민정음’과 책이름 《훈민정음》
(‘한글’이라는 명칭은 일제 강점기 때 국어의 자리를 일제에 빼앗기게 되면서 구별된 글자를 칭할 필요에 의해 1913년 즈음부터 쓰인 용어이지만, 이 글에서는 문맥에 따라 훈민정음과 한글을 혼용하여 쓴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 새롭게 창제한 문자 ‘훈민정음’은 의미와 명칭에서 두 가지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세종이 창제한 ‘새로운 글자의 공식 명칭’이었으며, 또 하나는 ‘새로운 글자를 해설한 책이름’ 이었다.
세종은 한글(훈민정음)을 창제(1443년, 세종 25)한 후 반포하기 전, 새로 만든 글자에 관한 해설서를 집현전 학자들(8명)과 함께 만들었다. 새 문자에 대한 해설서가 3년 만에 완성되자, 세종은 비로소 새 문자를 반포(1446년, 세종 28)했다. 한글 창제와 반포 사이가 3년인 것은 이 때문이다.
《훈민정음》이라 이름했던 이 ‘훈민정음’ 문자 해설서에는 세종이 직접 쓴 「어제서문(御製序文, 세종이 직접 한글 창제 이유와 목적 등을 밝힌 서문)」과 「예의(例義, 글자의 조형 원리, 음가 등 설명)」가 들어있고, 이어 집현전 학자들이 쓴 「해례(解例)」가 있다. 「해례」에는 새로 만든 문자의 사용법에 대한 자세한 풀이를 담고 있어 이 해례로 인해 이 책의 이름을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원본》 또는 그냥 《해례본》이라고도 한다.
《해례본》: 훈민정음 창제 맥락을 ‘한자로 설명한 해설서’
훈민정음 창제 당시 문자 언어는 한문이었고 무엇보다 지배층에게 새로 만든 문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자를 사용해야 했다.
'國之語音(국지어음)、異乎中國(이호중국)…(나라의 말이 중국 말과 달라)'으로 시작하는 「어제서문(御製序文)」이 바로 해례본에서 나온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이 직접 쓴 「어제서문(御製序文)」과 「예의(例義), 그리고 집현전 학자들이 쓴 「해례(解例)」와 「정인지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례」에서는 새 문자의 특성과 사용 방법을 설명하고 그 용례를 보여주며, 「정인지 서문」에서는 새 문자 창제의 동기와 필요성, 특징과 장점 등에 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훈민정음의 장점을 나열한 후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 나절이 되기 전에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 깨우칠 수 있다’고 기록하여 훈민정음이 배우기 쉬운 글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해례본》은 처음부터 많이 인쇄하지 않아서 조선시대에도 희귀했던 책으로 1940년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을 현재 간송미술문화재단에서 소장하고 있다. 《해례본》의 발견은 온갖 추측이 난무했던 한글의 창제 원리에 대해 바르게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한글 창제 반포에 관한 기록도 있어 한글날을 10월 9일로 지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언해본》: 《해례본》 중 ‘어제서문(御製序文)’과 ‘예의(例義)’를 한글로 풀어 간행한 책.
'언해(諺解)'란 한문으로 쓴 것을 훈민정음(한글)으로 해석한 것을 말한다.
《훈민정음 언해본》은 한문으로 쓰여진 해례본 중에서 세종이 직접 쓴 부분만 훈민정음으로 풀어 썼다. 즉, 「어제서문」과 「예의」만을 훈민정음으로 풀어 썼는데 「예의」는 훈민정음의 창제 배경과 목적, 새로 창제한 문자들의 운용 방법을 설명하고 있어 《훈민정음》의 본문이라 할 수 있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나라의 말이 중국 말과 달라)" 로 시작하는 문장이 바로 『언해본』에서 나온 것이다.
《훈민정음 언해본》은 해례본이 나온 직후에 나온 것으로 추측하지만, 오늘날 전하는 언해본은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에 기여했을 세종의 둘째 아들인 세조 때 만들어 《월인석보(月印釋譜)》(1459년) 1권 책머리에 실어 전국에 배포했다.
《월인석보》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하여 간행한 책으로 세 권 모두 훈민정음이 사용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세 권 책의 편찬에 대해서 잠시 짚고 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세종은 정실 부인인 소헌왕후가 죽자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수양대군(훗날 세조)에게 명하여 석가모니 일대기를 그린 책 《석보상절》(1447년)을 편찬하게 했다.
완성된 《석보상절》을 읽은 세종은 직접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짓는다. 훗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하여 《월인석보》를 간행(1459년)하였고, 책머리에 《훈민정음 해례본》 중 세종이 직접 쓴 부분만을 언해(한글로 해석)하여 넣어 아버지 세종의 뜻을 이었던 것이다.
《훈민정음 언해본》은 이렇듯 《월인석보》 책머리에 들어 있는 부분이지만 이 부분만 따로 만들어져 유통되기도 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문자 해설서’
《훈민정음》 「정인지 서문」에서 정인지는 '훈민정음'의 우수성과 가치를 비유를 들어가며 명료하게 풀어낸다.
'세계는 기후와 토질이 서로 나누어져 있으며 말소리의 기운이 달라 중국의 글자를 빌려 사용하는 것은, 마치 둥근 구멍에 네모난 자루를 끼워 넣는 것과 같이 서로 맞지 않는 일인데 억지로 같게 해서 매끄럽지 못하고 막혀서 답답하다'는 것이다.
‘이 글자로써 한문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 있고 이 글자로써 소송 사건을 다루면 그 속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며, ‘세종이 만든 28자는 그 전환이 끝이 없지만 배우기는 매우 쉬우며, 바람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의 홰치는 소리, 개 짖는 소리도 모두 이 글자로써 적을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사’가 발달한 한국어를 적기 위해 ‘조사’까지 한자를 빌려 사용해야 하는 불편을 감당해야 했던 당시,
훈민정음 창제는 말을 글로 온전히 쉽게 적을 수 있게 된 ‘문자 혁명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문자 해설서’라는 지위를 갖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국보 제70호인 동시에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매해 '세계 문해의 날(International Literacy Day)'인 9월 8일, 문맹 퇴치사업에 공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하여 세종대왕의 이름을 딴 ‘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UNESCO 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수여하고 있다.
차민아 / Cha Mina
한글닷컴(Haangle.com) 대표,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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