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5년 재위 7년이 되던 해 나는 임금과 하위직 관료와의 대화인 윤대를 정기적으로 시행하도록 조정에 명했다. ‘윤대(輪對)’라는 제도는 내가 처음 만든 제도는 아니었고, 당나라와 송나라 전성시대에 있었던 임금과의 ‘돌림 대화’이다. 조선왕조에...
1425년 재위 7년이 되던 해 나는 임금과 하위직 관료와의 대화인 윤대를 정기적으로 시행하도록 조정에 명했다. ‘윤대(輪對)’라는 제도는 내가 처음 만든 제도는 아니었고, 당나라와 송나라 전성시대에 있었던 임금과의 ‘돌림 대화’이다. 조선왕조에서는 내가 처음 제대로 한 셈이었다.
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은 공식적으로 조회(모든 관리와의 아침 회의), 조참(일부 신하들과 월 1회 갖는 회의), 상참(일부 신하들과 매일 여는 회의), 경연(학술정치토론), 상소를 통해 보고하고 토론하면서 이루어졌었는데 이를 통해 알게 되는 국정 상황과 백성들의 여론은 대부분 일정한 절차에 따라 여과되거나 이 눈치 저 눈치를 보게 됨에 따라 왜곡되어 전달되는 등 실제와 다른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급이 낮은 관료와 임금과의 솔직한 대화를 통해 국정의 실제 상황을 더 소상하게 알 수 있기를 원했다. 윤대는 주로 독대로 이루어졌고 사관의 참여를 금했다. 또한, 윤대에서 일어난 일로는 당사자가 책임지지 않도록 했다. 솔직한 의견을 듣고 여론의 왜곡을 막기 위해서였다.
윤대(輪對)는 백성들과의 실질적 소통 창구인 셈이다. 상참 등의 공식 회의에 참여하지 않는 관부가 순서를 정해 임금에게 정례적인 보고를 하는 행사이다 보니 문관은 6품 이상, 무관은 4품 이상으로 한정되었다. 문무 관원이 윤번으로 궁중에 들어가서 임금의 질문에 응대하기도 하고, 또 정사의 득실을 아뢰기도 했다.
나에 관한 연구와 교육으로 세종 전도사로 불리는 박현모 교수가 내 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나도 깜짝 놀랐다.
실제로 나는 해뜨기 전에 일어나 왕실 어른들께 문안을 드리고, 문안 인사가 끝나면 해 뜰 무렵에 일부 신하들과 학술 토론 세미나인 ‘경연’을 열었다. 경연 끝나야 아침을 먹을 수 있었고 곧바로 정기조회인 조참과 약식조회인 상참을 하면서 공식업무를 시작했다. 윤대는 이 이후에 이루어졌다. 점심 식사 후 낮 경연대회를 또 열었다. 그러고 나서 지방관 면담을 하고 야간의 궁궐 수비와 숙식 업무를 종결하여 대략 5시쯤 하루 공식업무를 끝냈다. 저녁 후에 저녁 경연도 열었으니 하루 공식 세미나를 세 번이나 한 셈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왕실 어르신들에 대한 문안 인사를 꼭 드렸으니 사실 공인으로서의 공식업무는 이때 끝나는 셈이었다.
세종의 하루 일과
- l해뜨기 전에 기상, 대비나 왕대비 등 어른에게 문안
- 문안인사가 끝나면 해뜰 무렵쯤 아침 경연(經筵)
- 경연(經筵) 끝나면 아침 식사
- 조회 [정기조회인 조참(朝參)과 약식조회인 상참(常參)] : 공식 업무의 시작
- 업무보고 받고(조계:朝啓), 관리들과의 윤대(輪對) : 오전 업무의 종결
- 점심식사 후 낮 경연(經筵) : 1시간 내외
- 지방관 면담 : 당부, 보고
- 야간의 궁궐수비, 숙직업무(호위군사 및 숙직관료 명단 확인, 야간 암호 결정):공식업무 종결, 오후 5시쯤
- 저녁 경연(夕筵) 참석
- 저녁식사, 휴식, 취침 들기 전 대비와 왕대비 문안
▲ 박현모(2008). ≪세종처럼≫. 미다스북스. 182쪽. © 세종신문
윤대 제도는 1425년 6월에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윤대하는 것은 동반(東班)은 4품 이상, 서반(西班)은 2품 이상이 매일 들어와서 대답하게 하시오.”라고 지식를 내렸기 때문이다. 곧 각사(各司)는 매일 1인이 마주 보고 일을 아뢰게 하였다.
사간원에서도 이런 제도에 대한 격한 공감을 아끼지 않았다. 두 달쯤인 8월 21일에서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지금 우리나라 윤대하는 법에 각사(各司) 4품 이상을 매양 정부와 육조·대간(臺諫)이 조계(朝啓)한 뒤에 인견(引見) 독대(獨對)하여 아랫사람들의 실정을 다 아뢰도록 하는데 이것은 진실로 성대(盛代)의 아름다운 법입니다.”라고 격찬했다.
이 제도에 대한 비판, 보완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이때 “사관이 참여하지 못하니 그 아름다운 말씀과 착한 행실을 어떻게 해서 후세에 전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제부터 윤대할 때에 사관도 참여하도록 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사간원에서 건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허락할 수가 없었다. 만일 사관이 지켜보게 되면 독대의 의미는 사라진다. 그만큼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게 된다. 그래서 사관을 물리치고 했으며 나는 하급관리들의 윤대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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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0월 6일 신미(辛未) 1번째 기사 / 정사를 보고 윤대(輪對)를 행하다.
17.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0월 7일 임신(壬申) 1번째 기사 / 윤대(輪對)를 행하다.
18.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0월 8일 계유(癸酉) 1번째 기사 / 정사를 보고 윤대(輪對)를 행하다.
19.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0월 9일 갑술(甲戌) 1번째 기사 / 정사를 보고 윤대(輪對)를 행하다.
20.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0월 10일 을해(乙亥) 1번째 기사 / 정사를 보고 윤대(輪對)를 행하다.
21.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0월 11일 병자(丙子) 1번째 기사 / 윤대(輪對)를 행하다.
22.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0월 12일 정축(丁丑) 1번째 기사 / 정사를 보고 윤대(輪對)를 행하다.
23.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0월 13일 무인(戊寅) 1번째 기사 / 정사를 보고 윤대(輪對)를 행하다.
24.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0월 14일 기묘(己卯) 3번째 기사 / 윤대(輪對)를 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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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이 윤대에 사관 입시를 허락하지 않아 실록에는 매번 “輪對”라는 두 글자만 남았다. @<온라인 조선왕조실록> 갈무리©
한편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진지하고 중요하게 나눈 대화가 남아 있지 않으니 후손들은 아쉬움이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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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백성들과 함께 /세종
한글 집현전(Editor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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