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재위 기간을 돌이켜보면 어찌 내가 한 일에 실수가 없겠으며 한 나라 임금으로서 또는 한 사람으로서 아쉬운 점이 없겠는가? 못내 아쉽고 후회가 되는 것은 1444년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최만리 부제학을 비롯하여 7명이 올린 언문 반대 ...
32년 재위 기간을 돌이켜보면 어찌 내가 한 일에 실수가 없겠으며 한 나라 임금으로서 또는 한 사람으로서 아쉬운 점이 없겠는가?
못내 아쉽고 후회가 되는 것은 1444년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최만리 부제학을 비롯하여 7명이 올린 언문 반대 상소를 받고 토론을 벌였음에도 그들을 의금부에 가둔 것이다.
하루 만에 풀어주기는 했으나 내가 아끼던 신하들을 그것도 덕망이 높고 청백리였던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대감까지도 가둔 것은 치명적인 나의 실수였다. 물론 내가 한 일을 후회한다거나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토론을 즐기고 웬만하면 화낼 줄 몰랐던 과인이 왜 그렇게까지 했는가가 후회되는 바이다.
그렇다고 이런 실수에 대해 먼 후손들에까지 변명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 정도로 화를 낸 것은 상소에 내가 얼마나 크게 분노했는지, 그들에 대해 얼마나 크게 실망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서 그 점을 해명하고자 한다.
부제학 최만리·직제학 신석조·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부교리 하위지·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 등이 연합 상소를 올린 것은 1444년 2월 20일이었다. 내가 언문 28자를 만들었다고 선언한 것은 1443년 12월이었으니 대략 두 달쯤 뒤였다.
내가 그들을 감옥에 가둘 정도로 화가 난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내가 10년 이상 연구해 백성들을 위해 만든 문자를 매우 신기하고 기묘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기이한 재주로 내리깎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빈말인지는 몰라도 상소문 첫머리를 “신 등이 엎디어 보건대, 언문을 만드신 것이 매우 신기하고 기묘하여, 새 문자를 창조하시는데 지혜를 발휘하신 것은 전에 없이 뛰어난 것입니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의 이 언문으로 말하면 새로 만들어낸 하나의 기이한 재주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학문에 방해만 주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곱씹어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라고 하면서 반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한자보다 더 뛰어난 문자를 만든 임금을 우러러보지는 못할망정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만든 이상한 재주 정도로 보고 있다. 그들이 나를 이렇게 깎아내렸어도 속으로는 언문의 놀라운 기능을 두려워하고 있음도 숨기지 않았다.
“진실로 관리된 자가 언문을 배워 출세한다면, 후진들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출세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생스럽게 성리학을 파고들겠느냐고 하겠사옵니까.”라고 하여 언문이 한문보다 뛰어나 한문으로 학문을 해야만 하는 소중화 풍토가 무너질까 두려워했다.
▲ 최만리 등 7인의 언문 반대 상소가 실린 ≪세종실록≫(1444.2.20.)
둘째는 한자를 몰라 억울한 백성이 생길 수 있음을 들어 언문 창제의 정당성을 부여한 내 논리를 엉뚱한 논리로 무시했다는 점이다.
내가 ‘사형 집행에 관한 법 판결문을 이 두 문자로 쓴다면, 글 뜻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도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으나, 이제 그 말을 언문으로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들은 두 가지 근거로 반박했다. 첫째는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죄인을 심문하거나 심의를 해주는 사이에 억울하게 원한을 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내가 한 말은 말과 글의 일치 문제가 아니라 문자가 누구나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는 효용성과 편의성이 중요함을 말한 것인데 엉뚱하게 중국 상황을 끌어와 반박한 것이다. 정창손은 한술 더 떠 억울한 죄인은 문자는 상관없고 관리 자질만의 문제로 다시 반박하니 내가 더 화가 난 것이다.
셋째는 그들의 지나친 사대주의 태도가 몹시도 못마땅했다.
그들은 “우리 조선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랐습니다. 이제 문자(한문)도 같고 법과 제도도 같은 시기에 언문을 창제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만일 이 사실이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라고 하면서 한자 이외의 고유 문자를 갖는 것은 저급한 오랑캐 나라나 하는 짓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았겠는가? 오랑캐 나라가 만든 오랑캐 문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중국이 조선의 새 문자를 안다 하더라도 무시했을 것이 뻔한데도 과잉 검열 논리로 반대 논리를 서슴지 않았다.
중국을 섬기는 사대주의 정치를 앞서 실천해야 하는 내가 어찌 중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문화와 과학 등 실용 분야에서 끊임없이 조선다움의 나라를 건설해 온 나의 노력을 모르지 않을 텐데 지독한 한자, 한문 사대주의 태도를 보이니 내 어찌 화가 나지 않았겠는가?
물론 절차로만 본다면 내가 분명 잘못한 게 있다. 몹시 서둘렀기 때문이다. “만일에 언문을 어쩔 수 없이 만든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바꾸는 중대한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들과 함께 토론하되, 아래로는 모든 벼슬아치와 모든 백성이 옳다고 해도 오히려 창제하고 반포하는데 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옵니다.”라는 그들의 지적은 표면으로는 옳다.
내가 여러 사람의 의논을 들어보지도 않고 갑자기 10여 명의 서리에게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옛날 사람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운서(한자 발음 사전)를 경솔하게 고치고, 언문을 억지로 갖다 붙이고 기능공 수십 명을 모다 판각을 새겨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서둘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절차를 밟아서 했다면 과연 창제, 반포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래도 이 상소문이 고마운 점이 있다. 김슬옹 후학이 ≪한글혁명≫의 “최만리 외 6인의 언문 반포 반대 갑자 상소의 진실”을 통해 밝혔듯이 반대 상소 덕에 ≪훈민정음≫ 해례본(1446)이라는 위대한 책이 나왔으니 김슬옹 후손 주장처럼 최만리에게 오히려 상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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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백성들과 함께 /세종
한글 집현전(Editor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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