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매체 혁명이 일어나 컴퓨터와 인터넷이 널리 쓰이기 시작할 때‘책의 종말’이야기가 나왔다. 모니터 영상이 종이를 대신하니 서점은 문을 닫고 도서관도 아주 작아질 거라고 했다. 그로부터 삼십 년쯤 흐른 지금, ‘챗지피티’라는 인공지능이 등장하여 ...
전자매체 혁명이 일어나 컴퓨터와 인터넷이 널리 쓰이기 시작할 때‘책의 종말’이야기가 나왔다. 모니터 영상이 종이를 대신하니 서점은 문을 닫고 도서관도 아주 작아질 거라고 했다.
그로부터 삼십 년쯤 흐른 지금, ‘챗지피티’라는 인공지능이 등장하여 그런 예상을 책에 매인 우스운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대화형’인공지능은 저장된 정보를 꺼내주기만 하지 않고 나름대로 질문을 이해하여 자기 말로 대답을‘생성’한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든 언어능력을 지닌 존재가 컴퓨터에서 태어났으니, 지금은 하인처럼 보이지만 이내 한 지능이 열 개 지능을 다시‘생성’하면서 인간의 주인이 되지 않을까, 온 세계가 기대와 함께 걱정에 빠져 있다.
인공지능이 일으킨 이런 소란 속에서, 필자는 전부터 하던 걱정이 더욱 커졌다. 그것은 한국인의 언어능력에 관한 것이다. 책의 미래와 상관없이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는데, 종이든 모니터든 거기에 주로 읽고 쓰는 건 여전히 글이라는 사실이다. 종이책이 이(e)북이 되고 종이 편지가 이메일로 바뀔 뿐 글말(문자언어)은 변함없이 사용된다. 그러니 전자매체가 인쇄매체의 종말을 위협해도, 언어능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아니 매체혁명으로 의사소통이 폭발적으로 늘었기에 훨씬 더 중요해졌다. 전에는 가끔 종이에 펜으로 썼지만, 지금 우리는 밤낮으로 문자판을 누르며 살고 있지 않은가.
근래에 글의 읽기, 쓰기를 중심으로 한 언어능력 곧 문해력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왜 갑자기 그에 주목하는 것일까? 영상에 쏠려 독서를 멀리하거나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학습을 한 탓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학생뿐 아니라 한국인 대다수의 문해력은 전부터 아주 낮았다. 필자의 경험으로 보나 각종 보고로 보나, 한국은 높은 교육열과 한글의 우수성 덕에 문자 해득률이 세계적으로 높은 데 비해 문의(文意) 해득 수준은 매우 낮았다. 말을 중요시하지 않는 문화 현실과 암기 위주의 교육 때문에 인쇄매체 시절부터 그래왔다. 필자는 그것을 가리켜 우리 사회는 ‘문자맹은 적어도 문의맹은 매우 많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문해력에 관심이 높아진 이유는 비대면 수업 탓도 아니고 갑자기 언어능력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까닭도 아닐 터이다. ‘지식산업 시대’, ‘제4차 산업’ 운운하는 추상적인 말은 제쳐놓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요즘은 많은 노동을 모니터 앞에 앉아 하는데, 이 모니터가 다름 아닌 책이요 노트이다. 읽고 쓰는 행위가 일의 주요 활동이 되고, 그 능력의 수준이 서비스와 생산물의 질을 좌우하게 되었기 때문에 문해력이 중요해진 것이다.
책과 펜을 밀어내는 기술이 반어적으로 언어능력의 필요성을 키운 셈이다. 디지털 환경에서 문자 행위는 이제 특정 계층의 전문적 활동이라기보다 누구나 수행하는 노동, 고급 실력자가 훑어보면 금세 ‘국어 (점수가 아니라) 능력’과 사고의 급수가 드러나는 노동의 일부로 일반화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문해력에 대한 관심이 반가우면서도, 거기서 지식산업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떤 불안과 위기감의 징후를 느낀다. 이 분위기를 살려 언어능력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예전에 유행한 ‘독서’, ‘인문학’, ‘교양교육’ 따위처럼, 잠시 말만 하다 지나치고 말면 어쩌나 걱정도 한다. 인쇄매체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글(정보)은 몰려오고 있다. 앞 시대의 문해력을 책 문해력이라 한다면 전자매체 시대의 그것은 ‘모니터 문해력’이라 부를 수 있다. 이제 모니터라는 책을 수준 높게 이해하고 새로 지어내지 못하면 개인이든 나라든 뒤처질 게 분명하다.
관건은 문해력이다. 하지만 그 능력은 금세 길러지지 않는다. 단어 양을 늘린다고 되지도 않고, 말글만의 문제도 아니다. 인공지능이 출현했으니 시키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나, 그걸 잘 부리기 위해서도 문해력은 중요하다. 가령 원하는 대답을 유도할 예리하고 창조적인 질문을 만들며, 마구 입력된 정보의 평균치를 출력할 인공지능의 대답을 깊이 해석하고 비판할 줄 모르면, 그것도 쓸모가 적다. 그런 일을 대신할 ‘프롬프트 엔지니어’라는 전문직이 생길 거라는데, 그에서 이미 고급 언어능력과 사고력이 부족하면 인공지능 활용도가 떨어져 ‘생성물’의 격차가 날로 벌어짐을 알 수 있다.
한 단어는 다른 단어와 결합하여 사물의 개념, 이미지, 정서 따위를 형성한다. 그들을 운용하는 언어능력은 내면의 힘과 협동하여 새로운 문맥을 형성하며 아이디어를 창출한다. 그래서 같은 어머니한테 말을 배운 형제끼리도 자라면서 그 수준이 달라진다. 문해력에 대한 관심의 불씨를 살려 시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 전체가 그러한 언어의 힘을 알고 그것이 사람의 정신능력과 한 몸임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에서는 문자의 사용을 ‘역사 시대’의 출발로 잡는데, 그로부터 문해력 즉 지식의 이해와 생산 능력이 ‘지식인’ 계층의 표징이자 권력이 되었고, 나아가 국력의 차이까지 좌우해왔다.
전자매체 혁명으로 책의 시대가 저무는 바람에 학자가 평생 모은 장서를 도서관이 받지 않는 문제는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매체 시대가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언어능력을 기르는 데는 교육과 노동에 대한 생각을 혁신하고 제도를 바꾸는 지난한 과업이 가로놓여 있다. 무엇보다 교육 풍토를 지식 암기 위주에서 읽고 쓰기를 통한 종합적 능력 신장 위주로 바꾸어야 한다. 문해력 문제는 저 육체 없는 ‘지능’의 시대에 한국인이 져야 할 크나큰 책무를 부각하고 있다.
최시한
작가, 숙명여대 명예교수 | shi22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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