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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학점을 받으려면 보고서와 시험 답안을 중국글자로 써야 했습니다. 중국글자를 숭상하는 이런 비효율적인 교육체계가 한의학 발전을 저해하고 국력을 낭비하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그 안타까움을 담아 그해 10월 『한글 새소식』에 「한자를 벗어던져...

높은 학점을 받으려면 보고서와 시험 답안을 중국글자로 써야 했습니다. 중국글자를 숭상하는 이런 비효율적인 교육체계가 한의학 발전을 저해하고 국력을 낭비하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그 안타까움을 담아 그해 10월 『한글 새소식』에 「한자를 벗어던져야 한의학 발전한다」는 글을 써 올렸습니다.

2001년 한의사가 되어 한의원을 열었습니다. 목공소에 약장을 주문하면서 약재 이름을 한글로 써달라고 했더니 난감해 했습니다. 약장 서랍에 글씨를 쓰는 서예가가 한글로는 써본 적이 없어서 쓸 자신이 없었던 겁니다. 하는 수 없이 약재 이름이 적히지 않은 약장을 주문해서 한글로 된 약재 이름표를 붙였습니다. 이름을 한글로 쓰니 가나다 순이라는 정렬 기준을 가질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쉽게 알아보고 편하게 약재를 찾아 쓸 수 있었습니다.

한글 기계화가 나라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지 공병우 박사님을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세벌식 글자판을 배워 쓰고 있었고 자료를 작성하고 정리하는 일에 컴퓨터를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진료부도 종이를 쓸 게 아니라 컴퓨터를 이용하기로 맘먹었습니다. 당시는 종이 진료부가 주류였고 전자 진료부를 보조로 쓰는 때였지만 전자 진료부만 쓰기로 하고 프로그램을 알아봤습니다. 전자 진료부 역시 중국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개발회사에 한글판을 요구했더니 기술상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바로 바꿔주었습니다. 세벌식 자판과 전자 진료부는 한의원 운영에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한의원도 사업입니다. 비용을 줄여야 벌이가 늡니다. 제가 한글을 쓰는 건 우리 한글이 이 경제적 관점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일을 마다하는 건 어리석습니다. 남의 나라 글을 통해 지식을 전달받아야 했던 대학 시절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남의 나라 말을 우리말로 바꾸는 데 많은 시간과 기운을 소모했습니다. 한의원 운영에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쉬운 우리 말글을 익히는데 힘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한의원 운영에 적용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소리나는 대로 그대로 적을 수 있다는 게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글을 가진 우리 민족 말고는 어느 나라도 이런 일을 우리처럼 잘하지 못합니다. 한글 배우는 게 너무 쉬워서 귀한 줄 모르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환자가 증상을 얘기하면 한의학 용어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적습니다. “앉아 있다 일어날 때 무릎이 아픈디 옛날같이 득신득신 애리지는 않습디다.”, “체기는 많이 가셨는디 지금도 오목가슴이 잔 답답해요.”, “다리에 힘이 없어서 포로시 걸어왔소.” 환자가 하는 말을 들리는 대로 적어 놓아야 환자의 아픔을 구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어서 진료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세종대왕께서는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백성을 안타까이 여겨 한글을 만드셨습니다. 자기 뜻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억울함이 쌓여 몸이 아프게 됩니다. 그렇게 아픈 사람이 병원에 와서 의사에게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면 병이 나을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사란 모름지기 환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 시작이 듣는 그대로 적는 일입니다. 환자의 말을 의사가 쉬운 말로 설명해주면 치료율 이 훨씬 높아집니다.

허리 다리 아픈 분들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리가 저리고 땅기는 건 허리 때문입니다. 몸을 세워주는 근육을 쓰지 않으니 뱃심이 점점 떨어지고 뼈로만 몸무게가 쏠려서 물렁뼈가 버티질 못한 겁니다. 흔히 ‘디스크’라고 하는 병이에요. 몸을 세워주는 근육을 키워줘야 나을 수 있습니다. 몸을 세워주는 근육은 가슴을 펴고 몸을 바로 세울 때 키워집니다. 힘들어도 배 근육을 써 몸을 자꾸 세워주셔야 허리가 튼튼해집니다.”

어깨가 아파 오신 분들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깨관절이 아픈 분들이 흔히 팔을 휘돌리는 운동을 하는데, 하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어깨관절을 지탱하는 근육들이 끊어질 수 있습니다. 수술을 해야 하는 그런 일은 무리한 관절 운동을 하다가 그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깨뼈가 움직일 수 있는 운동을 해주셔야 합니다. 어깨를 으쓱하면서 가슴을 편 채로 버티고 있다가 멈출 때는 반만 부리세요. 많이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몸살이 난 분들에겐 이렇게 위로합니다. “몸살은 목이 부으면서 열이 나고 입맛이 떨어지며 으슬으슬 추우면서 여기저기가 아프게 됩니다. 열이 나는 것은 면역 반응이 활발하다는 증거입니다. 입맛이 떨어지는 것은 내장을 쉬게 하라는 뜻이고 여기저기가 아픈 것은 근육을 쉬라는 충고입니다. 열이 심할수록, 입맛이 없을수록, 삭신이 많이 아플수록 감기는 빨리 낫습니다.”

이제 한글만 쓰자는 흐름은 도도해져서 아무도 맞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걸핏하면 중국글자를 배워 쓰자고 주장하는 무리들은 힘을 잃었습니다. 이제 한글에 걸맞은 쉬운 말을 쓰는 일이 중요해졌습니다. 전문분 야에서 일하는 이들이 쉬운 말의 중요성을 알았으면 합니다. 법률가들은 법률용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고 법전을 쉬운 문장으로 다듬어야 합니다. 공무원들은 행정용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고 각종 문서를 쉬운 문장으로 다듬어야 합니다.

저는 과학적인 한글을 도구 삼아 쉬운 우리말을 살려 썼고, 그 덕분에 23년째 거침없이 일하는 우리 말글 한의사입니다.




야마모토 미사키

박계윤

전남 장흥한의원 원장 | gyeyu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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