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을 처음으로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세종대왕의 위대함(?)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지만, 사실 머리로 받아들인 것이지 가슴으로,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나를 세종대왕한테 인...
세종대왕을 처음으로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세종대왕의 위대함(?)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지만, 사실 머리로 받아들인 것이지 가슴으로,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나를 세종대왕한테 인도해 준 철도고등학교와의 인연을 먼저 얘기해야겠다.
1977년 내가 입학한 철도고등학교는 서울 용산 한강 옆에 있었던 그야말로 특목고, 철도공무원을 양성하는 특별 목적 국립 고등학교였다. 전액 장학금으로 모든 것이 무료인 데다가 기차 특급까지 무료였으니 교복을 입고 처음 등교하는 날은 날아갈 듯 온몸이 가벼웠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벗들의 각양각색의 사투리가 교실을 더욱 신나는 기운으로 가득 채웠다. 그런데 입학한 지 얼마 안 돼 몇몇 친구들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신문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사연인즉슨 국립 학교인데도 기숙사가 없어 생긴 사연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력 때문인지 극빈 국가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개발도상국으로 나라는 어려웠다. 내가 다닌 업무과는 상업계라 타자를 배워야 하는데 타자기조차 몇 대밖에 없어 각자 스펀지로 타자기를 만들어 연습할 정도였다.
기숙사가 없다 보니 지방에서 온 학생들은 친척 집에서 다닐 수밖에 없었다. 다들 찢어지게 가난한 집 애들이 많아 자취나 하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다행히 나는 집이 수원 권선동이라 권선동에서 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수원역에서 기차를 이용하거나 1977년 처음 생긴 경수선을 이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친척 집에서조차 다닐 수 없는 몇몇 친구들이 신문 보급소에서 신문을 배달하면서 다닌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친구들을 달배 친구라고 불렀다.
이들 친구들 덕에 신문 구독 엄두를 낼 수 없는 처지임에도 공짜로 매일 신문을 보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신문은 좀 심하게 얘기하면 조사와 순우리말만 한글이고 한자 범벅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친구들은 신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행히 나는 초등학교 때 천자문을 배운 덕에 으쓱거리며 신문을 보았다. 중학교 때부터 한자 박사라는 별명도 있었던 터라 괜히 뽐내듯 신문을 보았다.
그런데 천자문을 뗀 나도 모르는 한자가 꽤 나왔다. 어떤 글자들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이를테면 아기를 뜻하는 ‘嬰兒(영아)’의 ‘嬰(아기 영)’자도 천자문에는 나오지 않았다. 한자 박사라는 우쭐감은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왜 ‘아기’라는 쉬운 말이 있는데도 ‘영아’라는 어려운 말을 그것도 천자문 뗀 사람도 읽을 수 없는 한자로 쓰는가? 세종대왕이 세계 최고의 문자라는 한글을 만들어 반포한 지 50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어른들은 한글을 무시하느냐는 생각에 미치자 한자를 섞어 쓰는 어른들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마침 그 당시 고등학생들한테 인기가 있었던 <학생중앙>이란 잡지를 보는데, 국어순화 운동, 한글운동에 관심 있는 고등학생들 모은다는 한글학회 부설 전국국어운동고등학생 연합회에서 낸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주말에 득달같이 달려갔다. 지금 충무로에 있었던 외솔회관 7층이었는데, 마침 그날 뒷날 유명한 배우가 된 서갑숙(당시 부회장) 사회로 무슨 토론인가를 하고 있었다. 당시 대신고 교사로, 지도교사였던 오동춘 선생님의 웅변조 마무리 말씀은 마치 교회 설교처럼 내 온몸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처음 온 나를 따뜻하게 맞아준 선배와 동료들 덕에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이곳에 모여 국어운동 하는 일이 큰 기쁨이 되었다.
학교 친구들을 대상으로 국어순화 운동도 하고, 한자를 섞어 쓰는 신문사에 항의하는 운동도 벌이고 내 삶은 거센 바람처럼 바뀌어갔다. 그 당시 내 이름은 한자식 이름으로 ‘김용성(金庸性)’이었는데, 내 이름은 ‘김용성’이지 ‘金庸性’은 내 이름이 아니라는 표기 거부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그런 운동이 용납되는 시대는 아니었다.
▲외솔 최현재 선생이 쓴 <우리말 존중의 근본뜻>
그러던 중 최현배의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이란 책을 친구들과 함께 읽고 토론하게 되었다.
전체 내용이 다 감동이었지만, “말과 글을 쉽게 하는 것은 그 말과 글을 쓰는 국민으로 하여금, 크게 유익함을 얻게 하는 근본 도리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현대와 같이 소수의 특수 계급보다 일반 다수의 대중 행복이, 시대적 요구가 되어 있으며, 민주주의스런 생활의 건설이 요청되고 있는, 이때를 당하여, 한 나라의 말과 글을 쉽게 하는 것이, 극히 필요한 기초 공작이 되는 것이다._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에서”라는 글귀가 더 다가왔다.
1977년 1학년 말에 나는 중대 결심을 했다. 한글학자, 한글 운동가가 되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래서 먼저 한자로 쓰지 않아도 되는 이름을 갖기로 했다. “우리 말과 글의 슬기롭고 옹골찬 옹달샘이 되자는 의미에서 ‘슬옹’이라 이름 지었다. 영등포에서 열차를 타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천안까지 간 적도 있었다. 아주 흔한 말과 잘 쓰지 않는 말을 섞어 창의적인 이름을 짓자는 나의 전략은 성공했다. 당시에 ‘슬옹’이란 이름은 없었다.
호적까지 바꾸려 하였으나 미성년자여서 아버지의 동의가 필요했으나 아버지의 불호령으로 바꾸지는 못하고 대신 친구들한테 알리기로 했다. 1978년 1월 6일 명찰 점에 들러 이름표를 새겼다. 이때 얼마나 기뻤던지 이름 바꾼 기쁨을 일기에 남겼는데, ”세종대왕님께서 웃으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라고 남겼다. 비로소 세종을 가슴에 품고 그 길을 가리라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2학년 개학 하자마자 새 이름표를 단 교복을 입고 갔다. 이때 이름표를 달고 용산사진관에서 찍은 교복 사진도 남아 있어, 세종을 가슴에 품은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이때만 하더라도 아주 부잣집 아니고서는 사진기가 없었다. 다행히 용산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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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세종신문>에 필자가 연재했던 것입니다.
김슬옹
한글닷컴(Haangle.com) 연구소장/편집위원, 세종국어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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