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어떻게 그 많은 업적을 남겼을까 학생들한테 묻곤 한다. 내가 알아서 물은 것은 아니고 나도 궁금해 함께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면 대부분은 천재라서, 임금이라서, 부지런해서라고 답한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답은 아니다. 나는 그 ...
세종대왕은 어떻게 그 많은 업적을 남겼을까 학생들한테 묻곤 한다. 내가 알아서 물은 것은 아니고 나도 궁금해 함께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면 대부분은 천재라서, 임금이라서, 부지런해서라고 답한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답은 아니다. 나는 그 정답을 세종실록에서 찾고 한동안 멍하니 아무 생각도 못하다가 감동과 환희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바로 1440년 세종 22년 1월 30일 자 기록이었다.
“병진년(1436년)에 최해산이 도안무사가 되어 급히 아뢰기를, ‘정의현(旌義縣)에서 다섯 마리의 용이 한꺼번에 승천하였는데, 한 마리의 용이 도로 수풀 사이에 떨어져 오랫동안 빙빙 돌다가 뒤에 하늘로 올라갔습니다.’라는 어느 노인의 목격 사건이 제주에서 바다를 건너 말을 달려 급히 세종 임금에게 보고되었다. 그 당시 용은 상상의 동물로 판명이 난 것이고 신령스러운 동물이라 임금과 관련된 곳에만 연결하던 때였다. 이런 때에 실제 용을 다섯 마리나 보았다고 하니 이것은 대형 사건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UFO 다섯 대를 봤다는 보고 이상의 충격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런 보고를 받은 세종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각종 강연에서 청중들에게 묻곤 한다. 대부분 ‘노인을 잡아 대령하라’는 엉뚱한 답변이 많았다. 그나마 나은 반응은 본 것을 자‘세히 조사해서 그림으로 그려오라’는 반응이었다. 이때 세종이 보인 반응은 무슨 임금만이 가능한 반응이 아니었다. 평범한 초등학생조차 가능한 반응이었다.
세종은 “(1)용의 크고 작음과 모양과 빛깔과 다섯 마리 용의 형체를 분명히 살펴보았는가. (2)그 용의 전체를 보았는가, 그 머리나 꼬리를 보았는가, 다만 그 허리만을 보았는가. (3)용이 승천할 때에 구름 기운과 천둥과 번개가 있었는가. (4)용이 처음에 뛰쳐나온 곳이 물속인가, 수풀 사이인가, 들판인가. (5)하늘로 올라간 곳이 인가에서 거리가 얼마나 떨어졌는가. (6)구경하던 사람이 있던 곳과는 거리가 또 몇 리나 되는가. (7)용 한 마리가 빙빙 돈 것이 오래 되는가, 잠깐인가. (8)같은 시간에 바라다 본 사람의 이름은? (9)용이 이처럼 하늘로 올라간 적이 그 전후에 또 있었는가?”와 같은 9가지 질문을 내려보냈다.
상상의 동물을 직접 보았다고 하니 이런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하게 하는 질문이 중요했던 것이다. 일단 세종은 (1), (2)와 같이 보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1차적인 사실 관계가 불확실하다면 사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일반 통념을 확인하는 질문(3)을 던졌다. 통상 용이 승천할 때는 천둥 번개가 요동치고 구름 기운과 더불어 승천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구체적인 정황을 확인하는 질문(4,5,7)을 던지고 그런 중요한 사건은 혼자 목격하기 어려우므로 함께 목격한 사람(8)을 묻고 있다. 마지막으로 동일한 사건의 예가 있는지를 통해 이 사건의 의미를 되짚고 있다.
그 노인에게 상을 주든 벌을 주든 그것은 이런 확인을 한 다음의 문제였다. 당연히 이런 식의 질문이 필요했고 이런 질문은 어린이조차 가능한 질문이었다. 문제는 우리는 평소 이런 단순하면서도 꼭 필요한 질문들을 제대로 던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질문이 더욱 위대한 것은 한 나라 임금이 변방 제주도의 한 노인에게 던진 질문이라는 것이다. 질문에는 그 어떤 경계도 없다. 나이도 신분도 성별도 벽이 될 수 없다. 설령 벽이 있다 하더라도 그 벽을 허무는 게 질문이다. 질문으로 우리는 대화를 열고 토론을 열고 문제 해결의 길을 연다.
세종의 질문은 당연히 노인에게 전달이 되었고, 확실한 목격이 아니었다는 노인 답변이 실록에 실려 있다. 세종의 합리적인 물음이 있었기에 이런 사실적인 답변이 나왔다. 세종은 끊임없이 물었다. 왜 우리는 죽어서까지 중국의 음악을 들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중국 농서를 보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중국 황제가 중국 하늘을 보고 만든 표준 시간을 따라야 하는가? 왜 우리는 우리말과 말소리를 제대로 적을 수 없는 한문만을 써야 하는가? 세종의 물음은 다양한 학문으로 발전되었고 정치로 이어져 많은 업적을 낳았고 세상을 바꾸는 힘의 뿌리가 되었다.
▲ 여주시 점동면 세종 경청 벽화. 맨 오른쪽이 필자, 나머지는 여주 시민들이다.
국제적으로 널리 보도된 행사에서 우리나라 기자들이 질문을 하지 못해 화제가 됐던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는 질문 특혜를 주어도 못해 망신을 샀고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세종식 질문에 평소 익숙해 있다면 한국에 온, 눈앞에 서 있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던질 질문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질문으로 위대한 학자가 되고 위대한 정치가가 되었던 세종의 질문법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세종은 질문대왕이었고 경청대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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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세종신문>에 필자가 연재했던 것입니다.
김슬옹
한글닷컴(Haangle.com) 연구소장/편집위원, 세종국어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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