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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읽기 습관은 양녕 형님 덕분

내가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독서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을 확실히 알고 싶어 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순전히 세자였던 양녕 형님 덕분이 아닌가 싶다. 양녕 형님은 총기 있고 발랄하며 매우 활달한 성품을 타고 태어났다. 그에게...

내가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독서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을 확실히 알고 싶어 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순전히 세자였던 양녕 형님 덕분이 아닌가 싶다. 양녕 형님은 총기 있고 발랄하며 매우 활달한 성품을 타고 태어났다. 그에게는 대궐의 갇혀 지내는 생활이 걸맞지 않았다. 독서보다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기는 왕자였다.

반면에 나는 책 읽기를 즐겨했었다. 나의 책읽기 습관과 남다른 기억력에 대하여 혹자는 나의 돌잔치 때 차려 놓은 상에서 덥석 책을 가져갔던 이야기를 전하면서 선천적으로 천재로 태어났다고 당치도 않은 얘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치 않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네 살 전후부터 항상 양녕 형님(3살 차이) 곁에서 놀곤 했는데 형님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듣곤 했다. 이때 어깨너머로 때론 글자를 익히고 또는 글 뜻을 새겨듣곤 했다. 다섯 살 이후부터는 혹시 의문이 나면 형님에게 물어서 새기는 일이 자주 있었다.

정식으로 왕자교육을 받기 시작하자 배우는 것들이 형님 곁에서 얻어들은 지식 때문에 거의 아는 것이 많아서 공부가 쉬워졌다. 더욱이 의미를 새길 줄 알게 되자 책읽기에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책 읽을 때 내가 아는 것이 나오면 기뻤고 스스로 그 뜻을 깨우치게 되자 책 읽기가 더더욱 즐거운 일과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 나는 독서에 푹 빠진 사람이 되었다.

책을 가까이 하니 놀랍게도 기억력이 좋아졌다. 그때부터는 특별한 가르침이 없어도 책만 있으면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다. 즉 나는 책 읽기에 문리(文理, 글 속에 담긴 뜻을 깨달아 아는 힘.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힘)가 터졌던 것이다.

나보다 약 300년 뒤에 태어난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도 소년 시절 유일한 낙이 독서였다고 하는데 나와 똑같은 성향이라고 여겨진다. 프랭클린은 18세기 미국의 정치가·사상가·발명가로서 미국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해 건국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전기에 관한 실험보고서와 이론은 유럽 과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는 한 번도 과학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1757년에 정계에 발을 디딘 뒤 30여 년 동안 큰 발자국을 남겼다.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으며, 2세기 동안 미국의 기본법이 된 미국 헌법의 뼈대를 만들었다. 혹자는 서양에서 나를 닮은 사람을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나와 더 닮은 이는 프랭클린이다.

나의 신하 서거정(1420년/세종2~1488년/성종19)이 그의 수필집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내가 ≪좌전(左傳)≫과 ≪초사(楚辭)≫는 100번을 읽었다고 하고 구양수(歐陽脩)와 소식(蘇軾, 소동파) 사이에 오고간 간찰문 ≪구소수간≫을 1100번 읽었다고 썼는데, 아무튼 간찰문 읽기 1100번은 과장된 점은 있으나 거의 다 외우다시피 한 것만은 분명하다.

서거정은 내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20년 되던 해에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26년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한 수재였다. 그의 학문은 천문·지리·의약·점성술·풍수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자(孔子)의 ≪춘추(春秋)≫를 해설한 주석서인 ≪좌전≫은 역사에 대한 고증과 해설이 풍부해 내가 좋아했고, ≪초사≫는 중국의 고전 시가를 통해 머리를 식힐 수 있어 즐겨 읽었다.

▲ 세종대왕 왕자 시절 독서도(김학수 작,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 © 세종신문

≪구소구간≫을 외우다시피 읽은 사연은 내가 죽고난 후 간행된 ≪세종실록≫ 1423년 12월 23일자에까지 실려 있으니 내가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내가 이 책을 좋아해서 이렇게 많이 읽은 것으로 오해하는 후손들이 많은 듯해 한 가지 부언하도록 하겠다. 내가 하도 책을 좋아해 식사 때도 책을 보며 식사를 할 정도였으니, 가벼운 고뿔인데도 아버지 태종께서는 책을 너무 많이 봐 아픈 것으로 오해를 하신듯하다. 고뿔에 걸려 머리가 아픈데도 책을 놓지 않았는데 갑자기 어린 내관이 오더니 “병환이 나을 때까지 책은 절대 아니되옵니다. 전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느닷없이 모든 책을 빼앗듯이 챙겨가는 것이었다. 그래도 책이 전혀 없으면 심심해할까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편짓글 모음책을 남긴 것이 ≪구소수간≫이었다. 내 눈빛이 간청했는지 어린 내관이 자비를 베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뒤로 내가 구소수간을 미친듯이 읽는 모습을 일러바친 궁녀가 있었는데 아버지 태종은 ‘저리 타고났으니 하늘의 뜻이로구나. 내가 막는다고 어찌 책을 멀리할까’라고 혼자 중얼거리시면서 웃으며 모든 책을 가져오라는 명을 어긴 어린 내관을 혼내지는 않으셨다고 한다. 아무튼 다행히 송나라 구양수와 소식이 주고 받은 편지가 은근히 재미도 있고 깊이도 있어 거듭거듭 읽게 된 것이다. 이책 덕에 고뿔이 빨리 나은 듯도 하다.

나는 이미 어려서 공자의 논어 학이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반복해서 익히면 이 또한 기쁘고 즐겁지 아니하겠는가!’를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과거 부왕께서 ‘소학’의 가르침에 늘 마음을 두셨으므로 내가 9세 이전에 이 책을 다섯 번 강독하였는데, 차례마다 규정을 두어 100번 이상을 읽었다. 그러므로 36년이 지난 후에 점검해봐도 처음 배우던 그때처럼 생생하기만 했다. 내용을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배워서 새것을 알게 되어 기쁨을 느꼈고 여러 번 반복해서 그것을 익힐 때마다 즐거움을 느꼈다. 중국 사신이 올 때는 중국어와 중국 서책을 두루 익히고 탐독하여 사신을 맞았다. 그렇게 준비한 탓인지 사신이 하는 말이 귀에 쏙쏙 들어오니 나는 금방금방 사신의 말을 앞질러 이어갔고 사신의 놀라는 눈빛이 역력했다.

나에 관한 학문(세종학)을 세워 내 이름을 딴 세종문화상까지 받은 김슬옹 후손이 내 독서법을 세종대왕 독서법으로 부르면서 “넓게 많이 읽기, 깊게 읽기, 더불어 함께 읽기”로 분석했는데 정말 정확히 내 독서습관을 꿰뚫어본 것이다(https://www.readingnews.co.kr 한우리독서신문 2020년 12월호 참조, 김슬옹, ≪세종학과 융합인문학≫ 참조).

나에게 책은 삶의 즐거움이었고 성현들과 만나는 지혜의 통로였고 애민 정치를 위한 도구였다. 이런 책을 양반들조차 한문이 어려워 제대로 읽을 수 없었으니 내가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하물며 한자를 배울 수조차 없었던 민초들과 여인들이 문자를 몰라 겪는 고충만 생각하면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고 그 꿈이 훈민정음 창제로 이어졌음은 후손들이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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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저작자(박재택,김슬옹) 동의로 공유합니다.





세종

훈민정음은 백성들과 함께 /세종

한글 집현전(Editor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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