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본의 대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왔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의 주인공 아사코가 다녔던 성심여자대학 학생들이다. 2박 3일간 한국의 방송사를 견학하고 문화를 체험하고 돌아갔다. 이 프로그램에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학생들도 함께 했다. 낯선 두...
얼마 전 일본의 대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왔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의 주인공 아사코가 다녔던 성심여자대학 학생들이다. 2박 3일간 한국의 방송사를 견학하고 문화를 체험하고 돌아갔다. 이 프로그램에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학생들도 함께 했다. 낯선 두 나라의 젊은이들이 만났다.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없었다. 일본 학생 중에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학생들이 3명가량 있었다. 그중 한 학생은 한국에 한 번도 오지 않았고 드라마를 보며 한국어를 공부했다고 했다. 한국 학생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통해 일본어를 간단하게나마 익혔다. 영어를 기본으로 한국어와 일본어로 학생들은 오래 만난 친구처럼 오래 이야기 나눴고, 인스타그램 주소 등을 공유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방송과 애니메이션 등 문화 콘텐츠가 사람을 잇고 있는 것이다.
방송사에서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만들었고, 현재는 방송을 연구하고 있는 나는 방송 콘텐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언어라는 것을 강조해서 가르치고 있다. 드라마 16부작 16시간 분량을 쥐어짜면 남는 것은 한두 단락의 문장이다. 그것이 드라마의 시놉시스(작품 개요)다. 시놉시스를 더 압축하면 남는 것은 2~3줄의 문장 즉, 로그라인이다. 로그라인은 등장인물의 상황과 핵심적인 갈등을 드러내는 문장이다. 로그라인을 요약하면 타이틀, 제목이 된다. 2박 3일은 쉬지 않고 보아야 하는 긴 드라마의 분량이 단락에서 문장 그리고 한 단어로 바뀌는 과정을 돌이켜보면 방송에서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금세 깨닫게 된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예능 역시 한 문장으로 압축되는 콘셉트로 시청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고, 다큐멘터리 교양 프로그램에서도 언어의 선택과 배열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제작진도 시청자도 잘 알고 있다. 뉴스 역시 영상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한들, 기자가 어떻게 해석해서 말로 풀어내는지, 또는 어떤 자막을 넣는지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영상이라는 힘은 언어를 통해서 증폭되기도 하고 감쇄되기도 한다.
따라서 콘텐츠를 기획하는 사람들은 언어에 민감해야 한다. 언어는 인류의 사고가 축적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고, 언어가 콘텐츠를 결정하기 때문에 기획자들은 의미론과 어원학 등 언어와 친숙해야 한다. 다양한 언어들이 주고 있는 의미와 감정과 뉘앙스를 잘 파악한다면 더 나은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대학에서는 인문학과의 위기라고 하지만, 사회에서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지고 있다. 인문학의 핵심은 바로 언어다. 언어를 통해서 사람이 남긴 흔적이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기록되고 전수되기 때문이다.
언어로 구성된 방송이 세계인을 매혹시키고, 그들이 방송의 고갱이인 언어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고, 한국인들 역시 한국어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이미 세계의 한류 팬들은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음악을 통해 한국의 진수를 맛보고 싶어 한다. 이들의 선택은 한국 제품을 구입하는 것과 한국 관광을 오는 것, 그리고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다. 한류 취향의 궁극은 한국어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언어로 구성된 방송이 세계인을 매혹시키고, 그들이 방송의 고갱이인 언어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고, 한국인들 역시 한국어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불고기, 치맥, 동치미, 갈비, 잡채, 김밥, 먹방, 삼겹살 등 우리말 단어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되었고, 한국어는 2021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학습되는 언어 세계 7위에 올랐으며, 빠르게 학습 수요가 증가한 언어로 손꼽히고 있다. 방송과 언어의 순환을 통해 한국어는 더욱 풍성해지고 있다. 이렇게 풍성해진 한국어가 케이 콘텐츠(K-콘텐츠)를 만드는 질료가 될 것이며, 더 창의적이고 참신한 콘텐츠들이 쏟아질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한류의 미래를 두고 한때의 유행이라고 보고 신통치 않게 보는 전문가들도 있지만, 케이 콘텐츠의 핵심에 한국어가 있다는 사실과 언어의 역할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한류의 미래는 계속 희망적이라 할 수 있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만드는 콘텐츠가 얼마나 많은 세계인의 의식과 무의식에 영향을 미치는지 상기하며 인류의 소중한 유산 중 하나인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뽐내면 좋겠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와 <동백꽃 필 무렵>은 제주와 충남 서천의 고유어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큰 사랑을 받았다. 지역의 고유어들에는 색다른 이야기와 정서가 담겨 있기 때문에 콘텐츠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조명 받지 못한 고유어들을 마음껏 떠가시라.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 역시 아름답고 건강한 우리말을 발전시키는 데에 역할을 다해야 한다. 한국 드라마의 발전이 수준 높은 안목을 가진 시청자의 끊임없는 관여와 참여에 빚진 부분이 크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콘텐츠에 사용된 우리말을 따져보고, 비판하는 역할도 무척 크다 하겠다. 지각 있는 방송사에서는 블랙아이스 대신 살얼음이라고 말하고 있고, 싱크홀 대신 땅꺼짐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깨어있는 콘텐츠 소비자들의 감시와 격려 때문일 것이다.
이제 한국을 나타내는 ‘K’는 선망의 기호가 되었고, 그 근저에는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갈고 닦아온 우리말의 힘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해본다. 문득 옷깃을 여미며 국어사전을 꺼내 펼쳐보고 싶다.
홍경수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 onkagzy@hanmail.net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