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환생한다면 우리 아이들한테 한글을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세종과 한글을 30년 넘게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는 나도 궁금하고, 내 주변분들은 더 궁금해하는 질문이다. 세종대왕이 대표 저술한 《훈민정음》 해례본(1446)은 사실 해설서이지 이 자체...
세종대왕이 환생한다면 우리 아이들한테 한글을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세종과 한글을 30년 넘게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는 나도 궁금하고, 내 주변분들은 더 궁금해하는 질문이다. 세종대왕이 대표 저술한 《훈민정음》 해례본(1446)은 사실 해설서이지 이 자체가 아이들 교육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독자는 15세기 모든 백성이었지만, 1차적인 대상은 양반 지식인들이었다. 과거 볼 수준의 한문 실력이 있어야 읽을 수 있는 한문으로 된 책이기 때문이다. 해례본의 일부를 번역한 언해본이 나와 있었지만 이 책도 모든 백성들이 볼 수 없는 드문 책이었다.
한글학자로서 30년 동안 온갖 저술을 해왔지만 아이들용 한글교육 책 내는 것이 가장 어려웠고 오랜 꿈이었다. 그러던 차에 2006년에 김영사의 박은주 사장 요청으로 2년에 걸쳐 교재를 개발했지만, 개발이 끝났을 때는 김영사 사장이 바뀌어 출판을 하기 어려웠다. 이때는 이미 100종이 넘는 한글교육 책이 나와 있었으므로 선뜻 이 원고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위)훈민정음 해례본(한글학회 교정본). 세종이 직접 저술한‘정음편’첫째 장(정음1ㄱㄴ).(아래) 훈민정음 언해본(문화재청 복원안) 첫째 장(정음1ㄱㄴ).
그래서 또 세월이 흘러 2018년, 역대 정치인 중에 한글교육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전 강길부 의원 요청으로 이 원고를 “세종식 놀이 한글교육 원리와 방법. ≪훈민정음과 교육≫(세종대왕 즉위 600돌 기념학술제 발표집)”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게 이르렀다. 이때 청중으로 온 한울림어린이 곽미순 대표 요청으로 3년간의 집중 보완 저술 끝에 ≪위대한 세종 한글≫(해설서 포함 5권)을 펴내게 되었다.
이 책의 주요 요점은 어린이 한글교육도 기본적으로는 해례본 방식으로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례본 방식은 무엇인가. 흔히 과학적인 제자 원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것은 해례본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말들이다. 해례본 방식은 한마디로 융합 원리다. 일종의 통합교육이다. 이야기 방식, 제자 원리 방식, 쉬운 낱말을 통한 응용 방식 등등이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66쪽에 걸쳐 백성들이 쉽게 한글을 깨치기를 바라는 세종의 마음이 한 편의 이야기처럼 담겨 있다. 이를테면 · 는 하늘을 본 뜬 글자이고 ㅡ는 땅을 본 뜬 글자이며 ㅣ는 사람을 본 뜬 글자이므로 한글에는 우주 자연의 이치가 담겨 있고, 그런 이치가 담겨 있는 훈민정음을 쓰는 백성은 양반이든 평민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늘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위대한 세종≫한글 표지.한글 모험을 함께하는 용용이와 냥냥이.
이런 세종의 이야기 정신을 따라, 모든 배움의 첫 단계를 [동화를 들어요]라는 이야기로 출발한다. 하늘나라의 용용이, 지구의 냥냥이라는 캐릭터를 개발해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판타지 동화로 구성했다. 그래서 “1권 ‘용용이와 냥냥이, 한글나라에서 만나다’, 2권 ‘용용이와 냥냥이, 거인나라에 가다’, 3권 ‘용용이와 냥냥이, 세종 한글 큰잔치에 가다’” 같이 모두 25편에 걸친 연작 동화로 이루어져 있다.
한글 모르는 아이들한테 무슨 긴 이야기인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어른들이 읽어 주어야 한다. 아니면 정보무늬(큐알코드)를 통해 들을 수 있다. 하긴 우리 아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제일 먼저 듣고 배우는 것은 ‘기역 니은 아야어여’도 아니고 ‘냉장고, 코끼리’ 등 외마디 낱말도 아니며 ‘가갸거교고교구규’ 음절표도 아니다. 그야말로 이야기다. “여보 힘들이었지요.” “똘망똘망 우리 아이 눈좀 봐.” 하면서 기뻐하는 부모님들의 말을 제일 먼저 들었을 것이다.
▲해례본 한글 표기 어휘 주제별 분류.
한편 해례본에서는 “올챙이, 병아리, 콩, 뱀, 파리, 밥주걱” 등 아주 친근한 낱말 123개로 한글을 배우도록 해 놓았다. 양반들을 위한 책이었지만 세종대왕은 아이들이 양반 어른들을 통해 배울 수 있도록 섬세한 배려를 한 것이다. 이런 정신에 따라 아이들에게 친숙한 330여 개 흉내말로 한글을 깨치도록 하였다. 한글은 말소리를 바탕으로 만든 소리글자이고 우리말은 전 세계 어떤 언어보다 흉내말이 발달했다. 그래서 흉내말이 이야기 속에, 놀이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흉내말로 한글과 친해지고 또 깨칠 때, 아이들은 언어를 감각적으로 익혀 상황에 맞게 활용할 수 있다.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래도 해례본 한글 교육의 핵심은 과학 원리이다. 세종은 현대 한글로만 본다면 가장 쉽고 간결하게 발음하고 쓸 수 있는 ‘ㅡ’와 ‘ㅣ’ 먼저 배우도록 했다. 또한 발음 기관과 입술 모양을 본떠서 자음 기본 상형자 ㄱ, ㄴ, ㅁ, ㅅ, ㅇ를 만들고 그런 다음 소리가 거세지는 정도에 따라 획을 더하여 ㄱ→ㅋ, ㄴ→ㄷ→ㅌ, ㅁ→ㅂ→ㅍ와 같이 글자를 만들어 발음할 때 같은 자리에서 소리 나는 글자들을 서로 닮게 만들되 잘 구별되도록 한 것은 세계 문자 학자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한글 특징이기도 하다. 이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여 같은 곳에서 소리가 나는 자음을 ㄱ ㅋ ㄲ(어금닛소리), ㄴ ㄷ ㅌ ㄸ ㄹ(혓소리), ㅁ ㅂ ㅍ ㅃ(입술소리), ㅅ ㅈ ㅊ ㅆ ㅉ(잇소리·입천장소리), ㅇ ㅎ(목구멍소리)로 묶어 익히는 것이 당연히 가장 효율적이다.
한글은 가장 빨리 깨칠 수 있는 문자다. 세계 문자학자들도 동의하는 보편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글을 빨리 깨치는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한글을 빨리 깨친 아이들이 성적도 더 좋고 사회에서 더 많은 일을 하는가? 당연히 꼭 그렇지는 않다. 이제는 빨리 깨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깨치는 것이 중요한 한글교육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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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세종신문>에 필자가 연재했던 것입니다.
김슬옹
한글닷컴(Haangle.com) 연구소장/편집위원, 세종국어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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