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직장은 제법 두꺼운 사전류의 간행물을 만드는 곳이었다. 여러 해에 걸쳐 사내 교정 교열 매뉴얼을 따로 정리해놓았을 만큼 맞춤법에 철저한 곳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맞춤법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곤 했다. 편집자로서 교정 ...
이전 직장은 제법 두꺼운 사전류의 간행물을 만드는 곳이었다. 여러 해에 걸쳐 사내 교정 교열 매뉴얼을 따로 정리해놓았을 만큼 맞춤법에 철저한 곳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맞춤법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곤 했다.
편집자로서 교정 교열 업무는 대개 『표준국어대사전』을 기준으로 적용하면 되고,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인터넷 검색 몇 번만으로 웬만한 맞춤법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렵게 느껴지는 맞춤법들이 더러 있는데, 몇몇 띄어쓰기나 외래어 표기법 등이 그렇다.
우리말은 기본적으로 문장의 각 단어를 띄어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런데 교정 교열을 하다 보면 단어이면서도 띄어 쓰지 않는 것들, 같은 조어 방식으로 보이는데, 어떤 것은 띄어 쓰고 어떤 것은 붙여 쓰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대개는 이미 오랫동안 붙여 써 와서 이미 한 단어로 굳어진 합성어이거나 합성어가 아니더라도 단위별로 띄어 쓸 수 있는 고유 명사 같은 예외들이다. 또 보조 용언 같은 경우는 단어이지만 용언을 보조하기 때문에 편의상 붙여 쓰는 것을 허용하기도 한다. 띄어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붙여 쓰는 것을 허용하는 것들은 편집부에서 하나의 규칙을 정해 통일하면 될 일이다.
문제는 세상의 모든 단어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전을 검색해서답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같은 조어 방식의 단어들에 적용되는 띄어쓰기 원칙을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때로는 하나의 사안을 확인하기 위해 한글 맞춤법 규정을 종일 뒤적이며 궁리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별 티도 안 나는 띄어쓰기 하나에 그렇게 매달리는 게 상당히 비효율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전임 편집자들도 그런 상황에 골머리를 앓았던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국립국어원에 문의를 넣어 보아도 매번 속 시원한 답변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 편집자가 투덜거렸다. 그러다 보니 편집부에서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어 있거나 예시로 제시된 단어에 한해서만 띄어쓰기 원칙을 적용한다는, 웃지 못할 방침을 정하고 말았다. 완벽한 띄어쓰기를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책잡힐 일은 만들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나 또한 그들의 고충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편집부의 내부 방침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원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매번 같은 문제에 부딪힐 게 뻔했다.
문득 사회 초년생 시절 잡지 기자로 일했던 때가 떠올랐다. 매달 원고 마감에 치여 살던 그때, 평소에 과묵하게 일만 하던 교열 기자가 내 자리로 와서 교정지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같은 글자라도 문장 안에서의 쓰임에 따라 띄어쓰기가 달라지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좀 구분해서 써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같은 ‘지’라도 시간을 나타내는 의존명사 ‘지’는 띄어 쓰고, 할지 말지를 뜻하는 어미‘-지’는 붙여 쓰는 식으로 말이다. 아마도 내 원고에서 매번 똑같이 틀리는 띄어쓰기를 반복해서 수정하는 게 그에게도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던 모양이다. 그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띄어쓰기까지 일일이 신경 쓸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지 않았고, 그가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그 띄어쓰기를 바로잡지 못했다.
맞춤법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잡지보다 호흡이 좀 더 긴 단행본으로 넘어오고 나서였다. 한 권의 책을 책임 편집하는 일을 맡다 보니 기본적인 교정 교열 능력이 필요해서 퇴근 후에 한글학회에서 하는 문장사 강의를 듣게 되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강의를 들은 기억만 어렴풋이 있었는데, 우연히 『한글새소식』 과월호를 보다가 국어문화운동본부의 남영신 선생님이 국어 문장을 다듬는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개설한 강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까지 나는 문장의 숲에서 단어 하나하나가 갖고 있는 역할이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겨를이 없었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지만 내 관심사는 어학보다 문학 쪽에 치우쳐 있었다. 내게는 자로 잰 듯 정확한 단어를 쓰는 것보다 안개처럼 나른하고 애매한 단어들이 더 매혹적으로 느껴졌고, 주술 관계를 바로잡는 일보다 뉘앙스에 따라 의도적으로 낯설게 배열된 단어들이 더 멋있어 보였다.
그런데 문장사 강의를 듣다 보니 익숙하게만 보였던 문장의 숲에서 전혀 다른 풍경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문장사 강의에 참석한 선배 수강생들은 하나의 단어가 어떤 방식으로 조어되고 활용되어 그 자리에 서 있게된 건지를 맹렬하게 토론하곤 했다. 때로 주장이 갈리면 그렇게 바라보는 이유를 여러 문법적인 근거를 들어 주장하면서 그 단어에 걸맞은 이름표를 붙여주기 위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 과정을 내내 지켜보면서 나는 별 의식 없이 구사하고 있던 우리말이 생각보다 더 논리적이고 정연한 문법적 토대 위에서 성립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장의 숲에서 만난 합성어는 태생부터 가깝게 자라 가지가 서로 맞닿은 연리지처럼 보였고, 비슷한 꽃을 피워도 잎이 다르면 영락없이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식물들처럼 문장의 숲에서 자라는 단어들도 모양이 같아도 그 쓰임에 따라 다른 이름표를 붙여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말은 그런 단단한 문법 위에서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아쉽게도 문장사 강의는 지금은 개설되지 않는 것 같고, 나 역시 그 강의를 통해 한글 맞춤법이라는 숲을 잠깐 엿보았을 뿐, 그 세계를 깊게 파고들지는 못했다. 다만 20여 년 전 한글학회의 그 낡고 추운 강의실에서 문장을 발골하듯 분석하던 선배들의 열정만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 편집자로서의 직업적 토대가 되어주고 있다.
전채연
수필가 | ccyy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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